1955년생 배우 기주봉은 어느 때보다 빡빡한 촬영일정을 소화하는 중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여정의 100부작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악역 윤환시, 본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럭셔리하다”는 <부활>의 정상국 회장 역을 통해 일주일에 나흘은 브라운관의 시청자들과 만난다. 한편 영화평론가 데릭 엘리가 “사라져가는 성격파 배우”로 안타까워했던 기주봉은 스크린에서도 여전히 ‘가장 짧은 분량으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강력한 조연으로 건재하다. 조연들의 향연이던 <주먹이 운다>에서도 아들에게 소화제를 건네는 계단 대화장면과 급작스럽게 죽어버리는 공사장 장면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형 기국서와 함께 76극단을 이끌며 한국 연극계의 큰 형으로 지내온 지도 30년이 되었다. 출연한 연극은 100편, 영화는 40편을 넘어섰다. 사상범이자 연극인이던 아버지의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따라 무대 위에서 오척단신의 카리스마를 마음껏 내뿜어온 그도 이제 지천명에 접어들었다. 일요일 늦은 오후 젊은이들이 빼곡한 홍익대 앞 카페에서 “선생보다는 선배라는 호칭이 좋다”는 그에게 연극, 영화, 그리고 배우의 삶에 관해 들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연극을 시작한 동기는 무엇일까.
=어릴 때는 무조건 나서는 게 좋았던 거지. 개구쟁이였으니까. 서라벌중학교를 갔는데 나서려면 연극을 하면 되겠더라고. 그런데 중학교에 연극부가 없네. 그래서 같은 고등학교 연극부를 기웃거렸지. 아마 대학교 때까지는 그런 나서는 게 즐겁다는 생각으로, 애들 앞에서 잘 노는 것 정도로 버틴 것 같아. “발성 좋네, 연기 좋네” 주위에서 칭찬해주니까 그냥 신나서 했지.
-20대에 이미 신촌의 무서운 아이, 동숭동 마라도나로 불리면서 각광을 받았다.
=마라도나가 한창 80년대 후반에 날리던 시절이라 그랬겠지. 작품 자체의 파격적인 면이 많이 작용했을 거다. 그런 것도 기억하나?
-인상적인 닉네임이라서. 대학교 예술제에서도 주인공을 맡았고, 76극단에서도 주인공을 상당히 이른 나이에 차지했다. 그러다가 현재 76극단의 역사가 이루어진 계기와 배우로서의 전환점이 있었다고 하던데.
=1978년 사뮈엘 베케트의 <마지막 테잎>을 했다. 모노드라마인데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아무것도 모르고 분석이 안 되어서 형(기국서)을 찾아갔다. 국문과 다니고 있었으니까. 욕 많이 먹었지. 그때 이게 잘 노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분석도 하고 많은 걸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때부터 말이 없어지고 별 생각이 다 드는 거야. 이를테면 내가 이렇게 키가 작아서 어떡하나. 앞으로 배우를 계속 해야 하는데. 모든 게 다 고민이 되는 거지. 그 이후에는 그게 기조를 이뤘던 것 같다. 그래서 의사를 표시하기보다는 안으로 머금는 스타일로 살아온 것 같다. 지금은 도움이 된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서는 방향으로 갔으면 전혀 다른 물건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언젠가는 정말 웃기는 캐릭터가 내 안에서 튀어나올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한번쯤은 나오겠지. 내 안에서 응어리진 기본적인 정서는 장난기니까. 편해지면 그게 나올 수 있다고 봐.
-연극 <관객모독>은 배우 기주봉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양동근, 리마리오 등이 참여하는데.
=사실 연출자는 마니아들, 연극 마니아들의 작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대중화되어 저변이 넓어졌지만. 1979년 초연 당시에는 신촌 근방이 떠들썩했다. 말 그대로 관객을 모독하는 연극으로 인식되면서 시작했으니까. 욕 부분이 너무 강해서 그랬던 탓도 있다. 내 입장에서는 가장 오래했고, 씹어도 씹어도 맛이 나는 작품이다. 양동근에게는 내가 하자고 했다면 리마리오는 국서 형이 생각하는 가능성이다. 작품과 순수한 연기로 잘되길 바란다. ‘누가 해서 잘되었다’는 방향의 공연을 바라지 않는다. 극단이 자생하려면, 수익이 되고 연속성을 줄 수 있는 레퍼토리가 하나는 있어야 한다. 우리 극단에는 효자 작품 <관객모독>이 그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30년 동안 100편이 넘는 연극에 출연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관객이 있다면.
=<마지막 테잎>을 공연하던 1978년이었다. 어느 날 관객이 딱 한명 왔다.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단 한명의 관객에게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 현실이 된 거다. 공연이 끝나고 분장을 지우는데 그 관객에게 전화가 왔다. “당신에게 안개꽃을 사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늦어서 꽃가게가 없다”고. 젊은 기분에 꽃 대신 맥주를 한잔 사달라고 했다. 맥주를 마시면서 젊은 연극인으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유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10년 전쯤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식이 그 여자가 시인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몰라도 참 고마웠던 사람이다.
-영화 중 가장 최근작인 <주먹이 운다>의 아버지 역은 전작들의 형사, 보스, 장군 같은 역과는 좀 다르다. 평소에 강변하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방향과 연결되는 연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서민의 아버지. 어쩔 수 없이 현실 때문에 자식에게 간섭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서민의 안타까움이 드러나는 아버지상을 표현하고 싶었다.
-죽는 배역을 정말 많이 했다. <주먹이 운다>에는 심지어 시체도 남겨지지 않는다.
=내 모습을 그대로 다 뜬 석고를 현장에서 봤다. 그게 뭉개지는 걸 보니 말 그대로 ‘아’라는 탄식밖에 안 나오더라.
-류승완 감독과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이어진 인연이다.
=그때는 영화를 좋아하는 젊은이가 참 열심히 한다는 생각에 도와주겠다는 심정으로 참여했다. 그 이후 류 감독이 급성장했지.
-<소름> <지구를 지켜라!> <번지점프를 하다> 등 신인감독들과 작업해서 결과가 좋았던 경우가 많았다.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소름> 때는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갔으면 싶었다. 스스로 배역을 받아들이느라 급급했던 면이 있다. 역할은 참 좋았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못해냈다. 개인적으로도 아쉽고 감독에게도 좀 미안한 점이 남은 영화다.
-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로 데뷔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영화를 하지 않았다.
=1980년에 <어둠의 자식들> <F학점의 천재들> 그리고 다른 한 작품을 했다. 그리고는 좀 적극성이 떨어졌다. 인연이 되어서 작품이 들어왔으면 계속 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사실 이장호 감독을 알게 돼서 영화쪽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91년 <명자 아끼꼬 쏘냐>에 참여했다. 러시아, 일본 로케이션이 있었다. 러시아 촬영을 끝내고 일본을 가야 하는데 한국에 온 상태에서 대마초 때문에 구속이 되었다. 일본 분량을 못 찍었다. 그 이후에 공백이 많이 생겼다. 91년부터 97년까지 공백이.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힘들었던 시절이다. 그러다가 95년 <아찌 아빠>를 하고, 97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출연을 재개한 건 돈 때문이었다.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그 시절에 생활연극연구소라는 걸 운영했던 걸로 안다.
=의정부, 포천에서 연극을 하던 시절이다. 포천에서 생활연극연구소를 했지.
-무대 아래에서는 레스토랑 방식으로 사람들이 관람하고, 위에서는 연극을 했다고 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굳이 정해진 패턴으로 연극을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무대에만 선다면 배우로서의 최소화된 개념은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친구에게 그 문제를 상의했더니 식당을 차려서 조그만 무대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연극을 하면 월급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혼자 할 수 있는 연극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혼자 할 수 있는 긴 독백들을 많이 추렸다. <리어왕>의 독백, <햄릿>의 클로디어스와 햄릿의 독백,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 로만의 독백 등 7∼8개를 추려서 했다. 막연히 독백을 하면 이해하기 힘드니까 연극에서 전후상황을 설명하고 독백을 10분 정도씩 시연하는 방식이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관객과 대화도 나누게 되고 하는 상황에 착안해 생활연극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음식점인데다가 연극을 많이 봤던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시골에 맞게 <배비장전>을 준비해 지방행사 같은 곳에서 공연도 하고 했다.
-<리어왕>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고.
=6개월간 연습을 했다. 고생 무지하게 했지. 지금 생각하니까 간단한데 그때는 정서적으로 뭐가 그리 복잡했는지 몰라. 스케일이 너무 크고 복합적인 면이 있어서 힘들었다. 내년이 우리 극단 창립 30주년인데 <리어왕>을 재상연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갈라쇼라는 거 아는가? 5∼10분 분량으로 시기별 레퍼토리를 통해 극단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다.
-경제적인 이유로 다작을 했는데 “아직 집 한칸이 없다”는 대답을 자주 보았다. 지금은 달라졌나.
=아직도 없다. 아직도 집이라는 건 없다.
-최근 수년간 연극 출신 남자배우들이 영화계로 대거 투입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생각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무대에서는 서로의 시선을 나눌 수 있는 리얼리티가 생겨난다. 영화, 방송은 카메라와 그 리얼리티를 나누는 것이다. 배우들이 훈련을 거듭해 그런 리얼리티를 카메라에 넘겨주는 게 가능해졌으면 한다. 그것 없이 카메라와의 리얼리티만을 생각하면 허점이 많이 생길 수 있다. 연극은 좋은 배우를 키워내는 터전이 되고, 영화나 방송은 그것을 제대로 잘 활용할 수 있는 관계에서 비롯된 현상일 것이다.
-희극적 요소를 키워서 주목받은 다른 연극배우들과는 달리 아직도 센 캐릭터를 고수한다.
=센 것도 아직 모자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틀림없이 더 있을 것이다. 그 끝을 한번 찾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유독 형사 역을 많이 했다.
=영화나 방송은 한번 맞으면 그 캐릭터와 기조를 계속 요구한다. 색깔을 바꾸려 해도 “다음 작품에서 바꾸세요” 이러니까. 처음에는 영화를 한다고 해도 총을 들거나 형사 이런 것은 안 하고 싶다고 했는데. 계속 이런 역만 하게 된 것도 신기하다. 촬영 중에 현장인 경찰서에서 경찰 분들이 아는 척을 하거나 반장님이라고 편하게 대해주는 경우가 많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자해장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반장 역을 기억하는 관객이 많다.
=<복수는 나의 것>은 낯선 이미지다. 한순간의 절박함을 보여줘야 하니까. <심판> 때문에 박찬욱 감독이랑 대구를 가게 됐다. 그 과정에서 <복수는 나의 것>을 언급하며 형사반장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더라. 좀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는 합의 끝에 맡은 역이 자해장면으로 이어졌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남자들만 득실득실했는데.
=드글드글이지 뭐. (웃음) 내 마음가짐도 거칠었던 면이 있다. 그 배경에는 촬영 전 <지피족>이라는 연극에서 영화감독 역을 했다. 떠들고 카리스마가 강한 그런 역이었다. 이명세 감독이 그걸 보고는 캐스팅했다. 그 톤을 유지해서 갔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현장에서 이명세 감독의 절실함이 기억에 남는다.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앉아서 주먹을 쥔 채로 자는 것을 보고, 참 각오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박찬욱 감독과의 관계가 각별하다. 연출자로서의 박찬욱을 말한다면.
=내가 보기에 박 감독은 굉장히 배우적인 태도와 기질이 강한 사람이다. <심판>을 할 때, 배우에 대한 애정이 유난히 강하다는 걸 느꼈다. 배우적인 욕구가 내적으로 많다는 느낌을 주는 감독이다. 그것이 배우에 대한 애정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작품을 준비하며 집에 가서 같이 자고, 술마시고,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것은 그 사람의 기질 안에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로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어려움을 안고 사는 일인 것 같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에 속해 있는데 그렇지 않아서 자유롭고 순수하게 살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렇게 “좋아 보이던 극단대표가 오늘 표랑 매출이 안 맞지 않냐고 따지는 모습에 환상이 깨져서 연극을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랑 똑같이 약삭빠르고 계산에 능한 사람이 무대에 서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좋은 연기를 할 수 있겠나.
-차기작은 문승욱 감독의 <로망스>이다. 10번째 형사 역이 되는데.
=정년퇴직을 앞둔 형사반장 역이다. 처음에는 퇴직 뒤 삶에 대한 걱정으로 속물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형사들의 의협심이라고 할까. 양심이라고 할까. 그런 것 때문에 전환점을 맞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