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뉴스]
[외신기자클럽] 무질서한 격투의 미학 (+불어원문)
2005-07-20
글 : 아드리앙 공보 (포지티브 기자. 영화평론가)
충동적이고 폭발적인 한국적 액션의 형식미
<말죽거리 잔혹사>

원화평 감독이 디즈니에서 <백설공주>의 쿵후 버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스타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판매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원화평은 무술감독이다. 그는 우아한 율동, 번개처럼 빠른 속도에서조차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움직임 같은 유려한 형식을 창조했다. 그렇지만 그 형식이 하나의 표준이 됐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최소한의 동작조차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난 전문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미국영화에 잘 융화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영화에선 완벽한 ‘아메리칸 보이’인 톰 크루즈도 파일럿으로 나올 땐 공중 급회전 묘기를 천번씩 해야 하고, 당구를 칠 때는 큐대를 빙빙 돌리는 곡예를 해야 하고, 술잔을 따를 땐 병으로 저글링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완벽함에 이른 이런 동작은 때로는 개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곡예 같은 러브신이 열정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트릭스>의 격투장면은 아름답지만 생기가 없다. 원화평 감독의 대척점에 있는 한국영화는 그것보단 덜 관능적이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갖춘 격투의 미학을 발전시켰다.

모든 것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매머드와 표범 사이의 대결 같은 느낌의 잊을 수 없는 격투와 함께 시작됐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당당한 풍채의 박중훈이 안성기에게 자근자근 두들겨 맞는 장면이었다. 그렇지만 내게는 거친 단편들이 뒤섞여 태어난 힘있는 작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야말로 진정한 전환점이 돼주었다. 진득한 음향, 회색 톤의 색조 속에서 감독은 배우들을 청춘의 터질 듯한 분노로 서로 뒤엉키게 했다. 이 데뷔작은 입 안 가득히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와 피의 맛을 남겨놓았다. 그 이래로, 우리는 주인공이 욕설을 퍼부으며 광기어린 시선으로 입에 거품을 문 상대방에게 몸을 던지는 장면을 기억한다. 주먹질이 돌풍을 이루고 면도날처럼 스크린을 가른다. 격투를 벌이는 사람들은 마치 개미떼같이 바글거리며 한 무더기로 엉켰다가 떨어져서는 부은 모습으로 헐떡거린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은 이소룡을 흉내내어 복싱 연습을 한다. 그는 각각의 동작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고, 그의 육체도 변해가는데…. 정작 그가 상대와 마주하게 됐을 때 그는 마치 한 마리의 들고양이처럼 달려든다. 마찬가지로 감동적인 독립 무술영화 <거칠마루>에서도 검은 띠 유단자가 아주 겸손한 태도로 거리 격투의 가치를 인정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결국 한국적 형식미는 움직임보다는 평온함에서 광기로 이행하는 요동의 순간, 즉 ‘페이스의 변화’에 더 매혹을 느끼는 것 같다. 한국 영화인들은 대결 그 자체보다는 육체가 정신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돌연한 순간을 영화에 담는다. 나는 계룡산에서 굿을 보고서야 이 점을 이해했다.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무당이 날이 선 작두 위를 걸을 때가 아니라, 신이 들리는 짧고도 갑작스러운 그 순간이다. 정지한 채, 타악기의 경련치는 듯한 소리에 단지 어깨만 조금 들썩거리는데, 불현듯 그의 몸 전체가 떨리면서, 뛰어오르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서 마치 지탱해주던 모든 매듭들이 끊어진 것처럼 완전히 해방된다. 굿이 끝난 뒤, 그녀는 지친 모습이지만 웃음짓는다. 피곤이 가득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격투 뒤의 한국영화 속 인물들을 떠오르게 한다. 넋이 나간 그들은 <주먹이 운다>에서와 같이 종종 서로의 팔에 안기게 된다.

나는 가끔 최남선의 아름다운 시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읽곤 한다. 바다는 내려치고, 부수고, 파괴하지만, 이어 모성애적 몸짓으로 소년을 어르기도 한다. 나는 이따금 한국영화의 미학이- 아름다움에 관한 개념이, 이 시에 전부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아름다움은 세련된 작업에 의해 분출되는 게 아니라 유기적이고 자발적이며 폭발적인 충동에 의해 솟아오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것 때문에 무질서한 격투장면들이 사람과 그의 열정을 향한 진정한 서정시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Esthetique de la bagarre

Yuen Woo-ping se prepare a realiser pour Disney une version kung-fu de Blanche Neige et les sept nains. Son nom est devenu un argument de vente au meme titre que celui d’une vedette. Yuen Woo-ping est directeur de combats. Il a invente un style fluide, des arabesques gracieuses, des mouvements parfaitement lisibles meme dans la vitesse la plus fulgurante. Il est cependant regrettable que ce style devienne une norme. Il s’integre, il est vrai, tres bien au cinema americain ou le heros est un professionnel si doue qu’il porte le moindre geste au rang d’art. Ainsi Tom Cruise, parfait american boy, ne peut pas piloter un avion sans effectuer mille pirouettes, jouer au billard sans faire des moulinets de sa canne, servir un verre sans jongler avec sa bouteille… Pour moi, cependant, en atteignant la perfection, le geste perd souvent sa personnalite. Tout comme une scene d’amour trop acrobatique se vide de passion, les combats de Matrix sont aussi beaux que froids. A l’oppose de Yuen Woo-ping, le cinema coreen a developpe une esthetique de la bagarre moins voluptueuse mais a la personnalite singuliere.

Tout a commence avec Nowhere to hide et le combat memorable d’un mammouth et d’une panthere : l’imposant Park Chung-hoon se faisait derouiller methodiquement sous la pluie par Ahn Song-gi. Pour moi, le veritable tournant fut cependant Die Bad, pelote nerveuse issue d’un amalgame de court-metrages sauvages. Sur une bande son saturee, dans des teintes grisatres, le tout jeune cineaste lancait ses acteurs les uns sur les autres avec une superbe fureur juvenile. Ce premier film vous laissait dans la bouche un gout de sang et de liberte inedit. Depuis, on connait ces scenes ou un personnage se jette sur son adversaire, bave aux levres, regard fou, hurlant une flopee d’insultes. Les coups tombent en rafales, striant l’ecran comme des rasoirs. Les combattants se nouent en une masse compacte, grouillante comme une fourmiliere ; puis se separent, tumefies et essouffles. Dans Spirit of Jeet-kune do, un lyceen s’entraine a boxer comme Bruce Lee. Il acquiert chaque geste methodiquement, son corps se transforme… mais lorsqu’il se retrouve face a son adversaire, il se rue sur lui comme un chat sauvage. De meme, l’emouvant film d’arts martiaux independant Geochilmaru voit une ceinture noire reconnaitre avec une belle humilite la valeur d’un bagarreur de rue.

Le style coreen semble donc moins fascine par le mouvement que par le changement de regime : ce moment de basculement, passage du calme a la folie. Le cineaste coreen ne filme pas tant l’affrontement que l’instant soudain ou le corps s’arrache a la camisole de l’esprit. J’ai compris cela en assistant a une ceremonie chamane dans les Keryong San. Le moment le plus fascinant n’est pas tant celui ou la chamane marche sur les lames aiguisees, que celui, bref et brutal, ou l’esprit entre en elle. Immobile, les epaules juste secouees par le spasme de la percussion, d’un coup, tout son corps se met a vibrer, sauter, virevolter, totalement affranchi, comme si les liens qui le retenaient avaient cede. Apres la ceremonie, je la retrouvai epuisee et souriante. Son beau visage marque par la fatigue me rappelait celui des combattant du cinema coreen apres le choc : etourdis, ils finissent souvent par se prendre dans les bras comme dans Crying Fist.

Je relis souvent le beau poeme de Choe Namson : ≪ De la mer a un adolescent ≫. La mer frappe, casse, detruit mais berce ensuite l’adolescent dans un geste maternel. Et il me semble parfois que l’esthetique du cinema coreen, son idee du beau, est tout entiere contenue dans ces vers. La beaute ne peut pas jaillir d’un travail sophistique mais d’une pulsion convulsive, organique, spontanee. Voila ce qui, je crois, fait de ces scenes de combat desordonnees de veritables odes a l’homme et a ses passions.

번역 진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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