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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지처 클럽의 망령, <분홍신>
2005-07-20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일러스트레이션 : 김연희
조강지처론과 명품론을 설파하는 <분홍신>

<분홍신>도 어김없이 ‘여귀’가 등장하는 공포영화이다. 흔히 ‘여귀’는 여성의 ‘욕망’이나 ‘한’을 상징하며, 남성중심주의를 위반하거나 징벌한다. 그러나 때로 남성중심주의가 ‘여귀’ 안으로 삼투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전선은 흐려지고 싸움은 부질없어진다. <분홍신>은 어떨까? ‘여성의 욕망’을 ‘질투와 물욕’으로 한정하여 끌고나가는 이 영화는 결국 ‘조강지처론’과 ‘명품론’을 설파하며,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공고히 한다.

‘조강지처론’을 통한 가부장제의 강화

<분홍신>은 혼란스러운 영화이다. 내러티브는 세 가지로 변천되는데, 첫째, 보면 뺏고 싶어지는 마법의 물신(物神) ‘분홍신’, 둘째, 일제시대 애인과 신발과 목숨을 빼앗긴 무용수의 원한, 셋째, 바람 피운 남편과 여자에 분노하는 여의사의 독점욕이다. 이를 위해 ‘동화’와 ‘신문기사’와 ‘해리성 정신장애’를 모티브로 가져오지만, 공포의 핵심이 ‘분홍신’인지 ‘선재’인지 결단치 못하고 반전을 번복하며 헤맨다. 원작동화에서 분홍신은 ‘향락의 욕망’을 환유한다. 춤추고 놀고 싶은 욕망은 노동과 복종을 주지시켜야 하는 지배이념에 어긋나기에 처벌받는다. 그것도 향락을 제어할 수 없고, 마침내 주체를 지배하여 재앙이 되는 방식으로. 이는 “놀기 좋아하면 평생 ‘니나노 판’을 못 면한다”던 중딩교사의 말이나, 마약의 위험을 경고하는 방식과 궤를 같이 한다. 이렇듯 동화의 분홍신은 향락의 상징이자 금기의 상징으로 구도가 명확하다. 그러나 영화의 분홍신은 불분명하다. 선재가 혼자 신어보는 분홍신은 나르시스틱하고 은밀한 성욕을 상징하고 일제시대 무용수의 분홍신은 자아실현을 상징하지만, ‘습득은 괜찮은데 강탈은 처벌받는다’는 분홍신의 저주는 ‘향락의 욕망’과 거리가 멀다. 무용수와 선재가 공유하는 감정은 ‘내 물건이든 남자든, 뺏어가는 년들에 대한 복수심’이다. 여기서 분홍신(물신)은 곧 남자(남근)요, 저주는 ‘조강지처 클럽’의 강령이다.

일제시대 신여성들이 대개 ‘첩’의 위치에서 자유연애를 꿈꿨고, 현재의 페미니즘도 가부장제 틀 안에서 남자를 사이에 둔 쟁탈전을 경계하며, 무조건 조강지처 손을 들어주진 않는다. <분홍신>에서 선재와 남편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지만, 남편이 집에 여자를 끌어들여 처의 신발을 신겨보고, 여자가 찾아와 “너 때문에 숨막혀했던 남편을 내놓으라”며 악을 쓰는 장면으로 유추하자면, 그녀의 지배로 열패감에 빠진 남편이 아내에 대한 대리지배 욕구로 바람을 피운 것 같은데, 영화는 모든 갈등을 생략하고 그녀의 복수만을 강조한다.

‘명품론’을 통한 자본주의의 강화

원작동화가 만들어졌던 ‘맞춤물건의 시대’에는 물건의 고유성이 중요했다. 그러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복제의 시대에 물건은 더이상 고유성이 없다. 영화에서 말하듯 “같은 신발이 한둘인가?” 인터넷에 사진이 돌아다니고 대형 광고판에 걸렸다면, 벌써 같은 디자인의 분홍신이 지하상가와 인터넷몰에 쫙 깔렸을 것이다. 딸이 신발을 갖겠다고 할 때 몸싸움을 하는 대신 “엄마가 똑같은 거, 작은 거 사줄게”라 말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연예인 따라잡기는 기본이요, 근미래 쌍방향 방송은 방송을 보면서 바로 클릭해서 상품구매가 가능할 예정이다. 물건이 탐나면 강탈하는 대신 복제하면 된다.

그래도 짝퉁과 오리지널은 다르지 않으냐고? 맞다. 몇 천원짜리 짝퉁이 범람해도 몇 백만원짜리 오리지널이 팔리는 이유는 바로 ‘타자의 욕망’ 때문이다. 예술품도 ‘아우라’를 상실한 시대에 상품으로 ‘아우라’를 주장하는 명품의 역설적 존재론이다. 그러나 명품 역시 상품일 뿐이며, ‘고유성’이 아닌 ‘고가성’을 지닐 뿐이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특별한 사람을 흉내낼 수 있다는 ‘돈 앞에 평등’이 구현된 것이다. <분홍신>의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건 또 어디 거야?”라는 대사처럼, 영화 속 뺏고 싶은 분홍신은 60년 된 골동품이 아니라, 명품의 현현이다(“왜 이래?”, “명품 신어!”).

<노랑머리>에서 그녀들은 ‘노랑머리’와 남자를 놓고 싸우는 대신 모방하고 수락하며 남자를 공유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소비의 틀 바깥에 살며, 급기야 레즈비언적 연대로까지 나아갔던 <노랑머리>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급진적 텍스트였다. 반면 <분홍신>은 ‘여성’의 욕망을 운운하지만, 결국 ‘첩년’을 응징하리라는 ‘조강지처론’과 저 여자가 가진 바로 저것, 짝퉁이 아닌 ‘명품’을 사야만 하는 ‘명품론’을 읊조리는 ‘마나님’ 혹은 ‘강남 미시’의 욕망을 말할 뿐이다. 영화 속 깜짝 놀랄 장면들이 ‘지하실 할머니’나 ‘지하철의 노숙자’의 등장이었던 것도 당연하다. 부르주아 마나님께 ‘거지’ 이상 두려운 존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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