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안 되면 운명이야, 하하”, <반칙왕>의 송강호
2000-02-15
글 : 황혜림
사진 : 이혜정

이 남자 행복하다? 요즘 좋으시겠다고 말문을 열었더니 그저 얼굴에 엷은 웃음기만 슬쩍 피운다. 그동안 은행원 겸 반칙 레슬러로 살면서 귀밑으로 꽤 길었던 머리를 어느새 <공동경비구역>의 ‘북한군답게’ 잘라 올린 채 쌀쌀한 겨울 오후의 스튜디오에 나타난 송강호. 지난 설 연휴에 개봉한 <반칙왕>이 벌써 서울에서만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이면서 그는 다시 한번 독특한 웃음의 파장을 일으키는 중이다. <넘버.3><조용한 가족>의 전력이 한층 무르익은 코미디 연기는, 일상의 틈에서 기발한 리듬과 뉘앙스로 웃음의 묘를 끄집어낸다.

지리멸렬한 일상에 찌든 은행원 임대호가 레슬링을 배우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해가는 <반칙왕>은 송강호가 가장 많이 나온 영화. 57회 쯤 되는 전체 촬영분 가운데 그가 빠진 장면이 약 2회 정도 밖에 안 되는, ‘첫 주연작’이란 수사가 부담스러웠던 작품이다. 그에게 대호는 ‘나 자신일 수도 있고, 주변에서 동떨어진 것 같지 않아 친근하고 애정이 가는’ 인물. 실적부진으로 상사의 헤드록에 시달리기 일쑤인 은행원과 포크로 상대 레슬러를 찔러 피를 보는 반칙 레슬러의 이중생활은, 송강호의 몸짓, 말투를 빌려 질감이 독특한 코미디로 살아난다. 삶의 희비를 우화적으로 녹여낸 코미디의 성숙만큼 그의 연기도 나름의 스타일로 익어간달까. “만들려고 한 건 아니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 스타일이 생긴 것 같다. 뭔진 잘 모르겠는데, 연기하면서 희극성이 최고조로 오르는 순간은 내 자신이 가장 진지했을 때다.”

영화도 잘 되고, 연기에 대한 전반적인 호평이 기쁘면서도 그는 ‘코미디니까’ 잘했다는 일부 단선적인 평가에 아쉬움이 남는다. 코미디가 호흡이 잘 맞고 제일 잘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지는 않기 때문. <반칙왕>도 코미디라서보다는 “사회조직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다가 잃어버리는 개인의 아름답고 고왔던 것들을, 레슬링이라는 원초적인 요소를 통해 되찾는다는 작품의 에너지가 너무 좋아서” 하게 됐다. 게다가 “인간 말고 연기자 송강호를 좀더 잘 아는” 김지운 감독의 작품이라 시나리오를 보기 전부터 맘이 끌렸다. <조용한 가족>도 같이 했던 김 감독과는, “대사와 대사 사이, 그 상황이 주는 묘한 코믹함, 그런 코믹함의 호흡과 뉘앙스가 너무 잘 맞아서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사이.

레슬링 영화니만큼 레슬링을 그럴 듯하게 하기 위해 여름철 하루 6시간씩 고된 훈련을 할 때는,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에 외롭기도 하고, 정말 이렇게까지 연기를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다 못해 “바닥 매트에 쓸려 파스 붙은 게 무슨 물감으로 칠해놓은 듯” 할 정도였다.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던 <쉬리> 때와는 달리, <반칙왕>에는 별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 “<반칙왕>에는 내가 저걸 왜 저렇게 했지 이런 게 별로 없다. 미진한 부분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최근엔 예쁜 딸도 얻었고,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촬영 때문에 북한 사투리 연습에 한창이다. <공동경비구역>은 인간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 기존 이미지와 달리 따뜻하고 인간적인 북한군 역이 맘에 들었다고. <반칙왕>보다 촬영 횟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 부담이 덜하다는 그는, 주연이 아니라고 행복해도 되나를 고민중. “두 가지 일은 못한다. 전력투구해야지. 재주도 없으니 노력해야 하고. 수려한 외모를 지닌 것도 아니고, 다양한 특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 남들이 한번 할 것 두번 하고, 그러다 안 되면 운명이야. 후회없이, 연연하지 말고 매달리지 말자. 하하, 멋있나?”

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배우 송강호

송강호는 여우다.

그저 웃기려고만 드는 코미디 배우가 아니다.

사석에서도 그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에는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계산과 포석이 깔려 있다. 슬쩍 지나치듯 해대는 어눌하지만 다의적인 언어구사엔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핵심이 있다. 그러면서 그런 투다. 알아들으면 다행이고 못 알아들으면 그만이다. 내가 알아듣는 눈치면 혼자 낄낄거리며 “농담이에요. 농담!” 그런다.

송강호는 칼잡이다.

자신의 슬럼프를 보기좋게, 근사하게 한칼에 베어버리는 칼잡이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도 비굴하게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는다. 차라리 구석에 틀어박혀 칼을 갈고 날을 세우며 때를 기다린다. 송강호는 품 속에 늘 서늘한 비수 하나를 품고 다닌다.

바라건대, 상대의 몸을 베려고 칼을 뽑기 전에 상대의 마음을 먼저 베는 진정한 검객의 모습을 기다려본다.

송강호는 조필이 아니다.

송강호를 거론할 때 <넘버.3>의 조필의 장광설을 기억하며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을 보면 아쉽다. 그전에 그에겐 <초록물고기>의 판수가 있다. 송강호의 연기세계를 얘기할 땐 판수얘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그가 줄곧 얘기하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있다.

송강호는 땡깡쟁이다.

<조용한 가족>을 개봉하고 흥행 성공의 조짐이 보이자 몇명의 스탭과 배우들이 술 한잔을 했다. 기분들이 좋았고 모두들 거나하게 술기운이 올랐다. 송강호도 기분이 좋았던지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더니 거기까진 좋았다. 갑자기 내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너 감독이야? 나 송강호야!”하는 투로 불만스러웠던 어떤 장면의 얘기를 꺼내며 “도대체 그런 상태에서 나보고 어떻게 연기하란 겁니까?”하며 찬바람을 일으키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순간,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냉랭해졌고 연기하는 후배 하나가 강호형이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거니 이해하라고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그의 행동이 하나도 밉지 않았고 그래, 배우가 저 정도 자존심은 가지고 있어야지 뭐 하는 식이었다. 그러던 찰나, 송강호가 다시 문을 활짝 열며 다시 들어왔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송강호는 자기 옆에 앉아 있던 후배를 쳐다보며 “너 일어나 봐” 한다. 일순 분위기는 또다시 급속도로 싸늘해졌고 모두들 의아해하고 있을 때 송강호 특유의 하이톤으로 입을 연다. “내 지갑 못 봤어? 이거, 어디 갔어? 내 지갑.”

송강호는 주역이다.

송강호의 <반칙왕> 인터뷰 중 나를 가장 감동시킨 말은 난 주연이고 조연이고 가리지 않는다. 난 주역이 되고 싶다, 라는 말이다. 송강호를 표현하는 데 더없이 근사한 말이었다. 저 친구, 어디서 저렇게 멋있는 말을 끄집어냈을까? 송강호는 촬영장에서도 나를 감동시키더니 항상 느닷없이 놀래키곤 한다.

그리고 송강호는 진정, 진정한 연기자다.

좋은 연기자와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은 감독에겐 축복이자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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