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팝콘&콜라] 현실이 공포스러워질수록 대중들은 공포영화로 도피한다
2005-07-28
글 : 서정민 (한겨레 기자)
<그루지>이 한장면

찌는 듯한 무더위에 공포영화를 찾는 이들이 많다. 사람이 무서움을 느끼면 교감신경이 자극돼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피부에 땀이 나게 된다. 이 땀이 증발하면서 표피체온을 낮추는 기능을 하는데, 공포영화를 볼 때 오싹한 한기를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포영화는 냉방시설이 변변찮은 시절의 알뜰 피서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요즘 극장은 추워서 긴소매 옷을 껴입어야 할 정도로 냉방시설이 잘 돼있다. 그럼에도 해마다 여름이면 무의식적으로 공포영화를 찾게 되는 것은 ‘여름=공포영화’라는 등식이 이제 영화의 제작·소비 패턴으로 완전히 자리잡았기 때문인 것 같다.

최근 들어 공포영화를 찾는 또다른 이유가 부각되고 있다. 현실의 공포가 심할수록 이를 기피하고자 오히려 가상의 공포를 찾는다는 것이다. 영화 속의 극심한 공포를 체험하면 현실의 공포는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또 공포를 이겨냈다는 자신감이 생겨 현실의 공포에도 의연하게 대처하게 된다. 최근 몇년새 미국에서 불고 있는 공포영화 열풍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9·11 테러 이후 일상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된 미국인들이 공포영화를 더욱 탐닉하게 됐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명 감독 겸 제작자들이 경쟁적으로 공포영화 제작에 나서고 있다. <더 록> <진주만>의 감독 마이클 베이는 자신의 제작사 ‘플래티넘 듄스’를 설립한 뒤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아미티빌 호러> 등 공포영화를 잇따라 제작해 짭짤한 재미를 봤다. <스파이더 맨> 시리즈로 유명한 샘 레이미는 공포영화의 고전 <이블 데드>로 감독 데뷔한 전력을 발휘해 최근 공포영화 전문 제작사 ‘고스트 오브 하우스’를 설립하고 <그루지> <부기맨>을 내놓아 흥행에 성공했다. <링> 시리즈와 <주온>(<그루지>) <검은 물 밑에서>(<다크 워터>) 등 일본 공포영화의 리메이크를 통해 새로운 공포를 찾아나서는 바람도 잦아들 줄 모른다.

국내에서도 공포영화 바람이 몇년째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국내 공포영화의 뚜렷한 특징은 여성, 특히 10대 소녀들의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이다. <분홍신>의 제작사 ‘청년필름’은 관객 중 70%가 10대 여성인 것으로 보고 있고, <여고괴담4: 목소리>의 제작사 ‘씨네2000’도 10대와 20대 초반 여성이 관객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 특히 10대 소녀들이 갖기 마련인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잊기 위해 공포영화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청년실업, 빈부격차의 심화 등 현실세계의 어두움이 짙을수록 도피처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렇다고 공포영화가 현실의 도피처 구실만 하는 건 아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공포영화에는 사회가 금기시하고 억압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사회적 메시지와 철학적 질문을 던져주는 기능도 있다”고 말했다. 사회가 안정되더라도 공포영화가 계속 존속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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