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기말>의 영화음악, 도발의 뮤지션 신해철을 만나다
2000-01-25
글 : 김혜리
사진 : 이혜정
“영화 음악의 쾌감… 보이잖아요”

“이렇게 음악에 무식한 기자, 만나 본 적 없겠죠?”

“이렇게 영화에 무지한 취재원은 만나 본 적 있어요?”

자격지심 어린 물음에 신해철(32)은 명랑한 반동을 보내왔다.

세상을 향한 외침으로 가슴 속을 먹먹하게 하는 송능한 감독의 영화 <세기말>을 신해철이 반주한다는 소식은 너무 당연하게 들려 별반 뉴스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직설과 조롱과 패션을 능숙하게 결합하는 그의 음악에서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줄곧 모종의 ‘아우성’을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주도면밀한 군주의 손길로 자신의 예술을 다스리는 이 자신만만한 음악 감독에게, 한 영화의 스탭으로 일하는 경험은 어떤 것일까? 새 앨범 <홈 메이드 쿠키스 & 라이브> 출반에 맞추어 지난 연말 뉴욕에서 귀국한 그에게 그 고충과 행복을 시시콜콜 물었다. 이제 네줄의 필모그래피를 갖게 된 영화음악가 신해철은 당김음과 스타카토가 군데군데 섞인 특유의 말투로 답을 들려줬다.

-근래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나요.

=<스타워즈 에피소드1>은 봤죠. 참고로 제게 좋은 영화의 기준은 UFO와 외계인이 몇 마리 나오나, 광선총, 비행기, 탱크는 몇대나 등장해 몇발이나 쏘나, 이도 저도 아니면 예쁜 여자가 나오느냐의 문제거든요. 그러니 남들이 뭐라건 제게 <스타워즈>는 명작이예요. 모선에서 로봇이 떼로 내려와 정렬하면 전 거의 울면서 보는 거죠. 루카스를 욕하는 사람한테는 그럼 그걸 모르고 봤냐고 묻고 싶어요. 세련된 대사나 빠른 진행이 있으면 그게 무슨 <스타워즈>냐고요.

-<세기말>은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정글 스토리>, <영혼 기병 라젠카>에 이은 당신의 네 번째 영화입니다. 지금까지 영화음악 작업이 스스로 불만스런 편이었다고 들었는데요.

=가요계와 달리 영화는 정교하고 합리적인 절차로 만들어지는 줄 알았는데, 시나리오도 고쳐지고 즉흥적 요소가 많이 끼어들더군요. 사운드트랙이 많이 팔리는 거야 대중 가수로서 제 위상과 관계된 문제고, 영화음악을 했으면 영화음악가로서 부끄럽지 않아야 하는데 얼마나 영화에 타당한 음악이냐는 면에서 확신이 안 서서 괴로웠어요. 한국 영화음악은 속도전에 강한 아티스트만이 가능하다는 점도 힘들어요. 이번에도 막판에 3일만 더 있었으면 하다가 나중엔 두 시간이 아쉽더라구요. 9시에 영화진흥공사로 떠나는데 8시 58분에 작업이 끝났어요. 2분 초과 달성했다고 좋아했지. (웃음) 그때 90여시간 못 잔 상태였어요. 미리 대본보고 뭐했냐고 염장 지르는 사람도 있는데, <세기말>에서는 가급적 동작과 음악을 전부 싱크로(음악과 액션의 일치)시키려 했거든요.

-소령(이재은)의 흐느적대는 모습 위에 트립합 풍 음악이 흐르는 장면은 박자가 딱 떨어지던데요.

=(한숨) 화면을 캡처해 컴퓨터에 넣고 프레임 단위로 맞춘 거예요. 할리우드처럼 영화와 음악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영화가 한해에도 수십편씩 나온다면야 “영화에서 모션과 음악 맞추는 게 뭐 중요해? 필(feel)이 최고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 영화는 그렇지 못하니까요. 내가 디테일을 틀려 영화 전체 완성도가 떨어져보이는 건 용납할 수 없었어요.

-당신의 영화음악은 굳이 영화가 없어도 되는, 마침 붙잡고 있는 음악 장르를 한번 펼쳐보는 장이 아니냐는 말이 있어요. 영상과 맞물린 시너지 효과가 부족하다는 평도 없지 않았고요.

=수긍해요. 기왕이면 관심있는 장르와 일치하면 이상적이겠죠. <영혼 기병 라젠카> 경우는 애니메이션을 아동물로 보는 시각에 대들기 위해 아예 “오버하겠다”고 선언하고 헤비메탈에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조져버린 거였구요. 그런데 대중가수 써서 영화 팔아먹겠다는 셈이 뻔히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영화음악 맡겨놓고 내가 사운드트랙에 노래를 하건 말건 대체 무슨 상관인지. 시나리오를 거절할 때는 대개 그런 경우죠. 영화에 무리를 줘서라도 노래를 입혀서 팔려고 출연 제의까지 하면서 “너도 연예인인데 이런 거하면 좋잖겠니?”하는 뉘앙스로 전화하면 속으로 이러죠. ‘넌 구면이었으면 맞았어’.

-뉴욕에서 <세기말>의 러쉬를 받아보며 작업하셨죠. 영화를 본 후 아이디어 변화가 있었나요.

=<세기말>이란 제목에다 신해철이라는 이름이 주는 선입견까지 겹쳐 다들 저패니메이션 풍 디스토피아 풍경에 현란한 테크노 음악을 상상하더군요. 제작진도 음악에서 스피드를 기대했구요. 제 첫 구상은 아주 느린 템포로 가는 거였는데 결국 차선책을 택했죠. 영화 속 단락마다 음악에 질감 차이를 내기보다 세 가지 플롯이 물고 물리는 지점을 음악으로 더욱 고조시켰어요. 음악 혼자 “나 죽이지?” 하기보다는 시퀀스가 달려갈 때 옆에서 쫓아가는 느낌으로 했는데, 감독님의 도움이 컸어요.

-<세기말>의 음악은 당신의 어떤 영화음악보다 화면 뒤쪽에 물러서서 삼가는 인상인데요.

=당연한 거죠. 이기적으로 생각하면 이 부분에 음악을 왜 까는지 반대할 대목도 있지만 중요한 목표는 영화가 좋아지는 거지 내 음악이 좋아지는 게 아니잖아요. 상호보완 관계지요. 예컨대 소령의 테마가 별로인데 멋있게 들린다면 연기자와 감독이 만든 필름이 좋아서 음악을 살리는 경우고, 감독이 아쉬워하는 장면에서는 제가 희생 번트를 대서 해결하고 넘어갈 수도 있고. 서로 잘 인내한 것 같아요.

-영화음악이란 아무래도 막후에 있는, 말하자면 보통 음악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갈’이 물려진 상태일텐데요. 어떤 재미와 갑갑함이 있을까요.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희석하고 싶을 때 영어가사를 쓴다고 했던 예전 인터뷰도 기억나는데.

=영화음악만의 쾌감이라… 일단 보이잖아요, 음악이? 공연장에서 똑같은 볼륨으로 연주하는 솔로 플룻에 핀 라이트를 때리거나 조명을 이동하면 누구나 소리가 커지고 움직인다고 착각하듯 말예요. 제가 음악을 하면서 전권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는 영화음악 뿐입니다. 영화음악은 기본적으로 동전을 공중에 던져올려 세우는 밸런스의 문제예요. 화면을 삼키지도 않고 밀리지도 않는 줄다리기가 재미이기도 하구요. 갑갑함이야 알고 시작하는 것이니 영화에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뭔가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해요.

-영화 속에서 가사 있는 음악과 연주곡을 쓸 때 어떤 차이를 두나요?

=일단 목소리가 들어가면 구체성이 생기니까요. 느낌을 따라야지 공식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가사 없는 음악을 선호해요. 더군다나 기존곡이 아닌 새로 지은 멜로디를 쓰면서 목소리까지 얹는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작업이거든요. 관객이 기억하는 멜로디라면 음악에 대한 부담없이 화면의 집중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새로운 선율에 새로운 목소리가 나오면 이도저도 아니기 쉽죠.

-<접속> 이후 익숙한 팝 음악을 골라 묶은 사운드트랙이 시장에서 성공하고 있는데요.

=그저 쉽게 가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정말 제대로 맞아 떨어진다면 그것도 상당히 우수한 방법일 수 있겠죠. 그런데 <세기말> 경우에는 카페에서 대화하는 장면에 쓰인 음악도 전부 창작이에요. 그 경우에는 관객이 그것이 창작곡인지 모르게 숨겨야 하는 문제가 남죠. 선곡만 하면 편하겠지만 그건 제가 할 일이 아니고 전문가가 따로 있잖아요.

-내러티브와 음악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뮤직비디오도 영화음악과 멀지 않지요.

=뮤직비디오를 제가 주도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건 전문가 영역이니까요. 남의 능력을 끌어내 조합하지 않으려면 혼자 하는 게 낫고 같이 하려면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콘서트 연출에서도 전체적 컨셉이나 의상을 어떤 색으로 하며 조명으로 집단 최면 효과를 노린다 이런 내용은 신경 쓰지만 소소한 카메라 움직임까지 챙기진 않아요.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운드에 큰 공을 들이는 음악인으로 알고 있는데, 음악을 맡은 영화를 극장에서 들어본 적 있나요?

=들어봤자 뻔하다고 생각해서 시사회도 안 갔어요. 사후처리를 아무리 잘 한들 일단 제가 만든 게 꽝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새 음반 냈을 땐 어떠냐구요? 일주일은 “시팔, 해 냈어” 하는 자뻑(자기도취)의 시기가 있고, 한달 지나면 분위기가 뭔가 아닌 것 같다 하다가, 두달쯤 되면 “에이 빨리 다음 앨범 내서 땜빵하자”라고 생각하죠.

-자기 작업뿐만 아니라 대중음악판의 지형을 늘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 속의 역할을 고민해 온 뮤지션인데, 초대받는 손님 입장에서 본 영화계는 어떤지.

=그쪽에서는 날 식구로 인정할지 모르지만 약간의 동지의식을 느껴요. 사촌뻘이라 해도 어떻게 한 나라에서 영화만 오방 좋아지고 음악은 후져지겠어요? 아직 갑갑스런 대목이 많아도 우리 세대가 같이 안고 가는 숙제라 생각하고 함께 가는 거죠.

-영화음악 그만 하겠다고 말했다면서요. 진담인가요? 앞으로 음악인생 계획은?

=제가 제일 짜증나는 게 음악을 수세적 입장으로 만드는 거예요. 세모난 네모이면서 동그라미. 뭐 이런 완벽한 음악을 만들고야 만다는 마음으로 “들어봐 자식들아, 죽이지?” 하는, 교만에 가까운 마인드로 음악을 해야 뭐가 되는데 망치면 안 된다 정도 감정으로 쫓기는 처지에 몰리면 원망만 늘죠. 그런데 제가 원하는 제작비와 기간을 보장할 작품은 앞으로 5년내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아요. 조건이 갖춰지면 계약서 써야죠. 3개월에서 하루라도 빠지면 돈 들고 튄다고. 계획이라면 거대한 모자이크를 한 바늘씩 꿰는 작업을 계속하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그 모자이크의 발가락 끝 정도 보여드렸다고 생각하구요. 만약 이 선에서 제가 전업작가로 버틸 최소한의 제작비와 생활비를 팬들이 안 대주면 저의 스토리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겠죠. 그런 삶도 나쁘진 않아요. 듣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으니. 음악가는 비참한 것이, 아무리 좋은 걸 만들어봐야 남들 만든 것 중에 훨씬 좋은 음악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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