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가죽 의자가 어색한 남자, <웰컴 투 동막골>의 정재영
2005-08-08
글 : 문석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혹시 이 차 빌리신 건가요?” 한강 고수부지에서 촬영을 마치고 인터뷰 자리로 옮기기 위해 흰색 밴을 얻어타는 순간 입에서 맴돌았던 질문은, 끝내 발설되지 않았다. 그런 눈치를 챈 건지, “옮긴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주더라고요”라고 정재영이 선수를 쳤기 때문이다. 큼직한 가죽 시트의 아늑함을 즐기며 정재영과 밴, 어울리지 않는 두 항의 함수관계를 따지고 있을 즈음 그가 말한다. “이게 아주 어색해요. 밴에서 내가 내리면 사람들이 그럴 거 아녜요. ‘어, 배우는 안 탔나 보네’라고.” 민망해선지, 겸손해선지, 한국 연예계에서 밴이 상징하는 바를 애써 무시하려는 그의 말을 듣는 도중 바퀴가 스르르 멈춘다.

물론 밴의 존재 유무를 떠나더라도, 정재영이 한국 영화계의 대표 배우 중 하나로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산부인과> <박봉곤 가출사건> 같은 영화에서 아주 미미한 역할을 맡았던 그는 <킬러들의 수다> <피도 눈물도 없이> <실미도> 등을 거치며 인지도를 높였고, 결국 지난해 <아는 여자>을 통해 확고한 주인공의 가죽 의자를 따냈다. 곧 개봉하는 <웰컴 투 동막골>은 그 시트에 광을 먹이고 쿠션을 더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동막골이라는 평화의 땅에 표류한 북한군 상위 리수화를 연기한 그는 이전 어느 작품에서보다 더 중요한 영화 속 거점을 장악한 채, 안정감을 만들어낸다. ‘군중영화’라는 그의 표현처럼 수십명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웰컴…>에서 정재영은 신하균(한국군 소위 표현철 역)과 함께 긴장과 안도, 웃음과 눈물을 끌어내는 주역이다.

그렇다고 눈을 부릅뜨고 악을 쓰거나 헬렐레거리며 과장된 몸짓을 하는 건 아니다. 그는 군인 특유의 박력을 간직하면서도 서서히 마을 사람들의 순박함에 젖어 살벌한 증오심을 거두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사실 시나리오를 봤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예를 들어, 치열한 전투에서 겨우 셋만 살아남아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데 뭔가가 탁 지나가죠. 그래서 긴장을 한 채로 ‘적군이가 뭐이가’라고 총을 딱 겨누는데, 약간 모자란 여일(강혜정)이 ‘거기 뱀이 나와’ 하잖아요. 그때의 반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정색해서 세게 갈 수도 없고, 코믹하게 갈 수도 없는 거잖아요.” 결국 촬영 초반 캐릭터와 컨셉에 관한 박광현 감독과의 토론은 필수적이었고, 외줄을 타는 듯한 정재영의 균형감각이라는 산물을 낳았다.

대작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히 기생하는 여러 난관 외에 <웰컴…>만의 난제는 추위였다. 2004년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촬영된 탓에 촬영장의 배우 대기실은 한구석에 피워놓은 모닥불이었고, 쌓여 있는 흰 눈은 촬영장의 뽀드득거리는 바닥재였다. 정재영의 한파 타개책은 단순했다. “술. 몰래 매니저에게 이과두주를 부탁해서 하균이와 종이컵에 담아서 홀짝홀짝 마셨어요. 그래도 대기하고 있다가 촬영하러 나가는 순간 확 깨버려서 항상 마셨죠. 밤장면인데 뭐 티가 나나요.” 관상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쉽게 감이 오는 정재영의 ‘친알코올성’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진행 중인 <나의 결혼원정기> 촬영장에서도 익히 알려진 바다. “그게 아니라, 거기선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서 마신 거죠. 유난히 술에 취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고요.”

<아는 여자>의 어리버리한 야구선수와 <웰컴…>의 스스로 손에서 힘을 놓는 북한군 장교에 이어 <나의 결혼원정기>에서 그는 친구 손에 붙들려 우즈베키스탄으로 ‘신부 사냥’을 떠나는 농촌 총각 역을 맡았다. 어딘가 조금은 풀어진 모습을 연달아 연기하고 있는 거다. 생각해보면, 정재영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긴 것은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나 <실미도>의 상필이 같은 강한 남성 캐릭터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그냥 강한 캐릭터는 별로 안 좋아해요. 사실, 독불이 경우도 세서 좋았던 게 아니라 나약해서 마음에 들었거든요. 저는 엘리트보다는 나약한 사람, 그런 나약함 속에 강한 면이 있는 쪽이…. 그리고 상류층 얘기보다는 밑바닥의 그런 게…. 요즘 시나리오 보면 세련되고 재밌는 형사물도 많이 있더라고요. 보면 재미있어요. 그런데 작품의 정서나 인물의 정서가 안 느껴지더라고요.”

취향과는 무관하게 정재영은 최근 들어 한국영화의 시나리오가 많이 발전했다고 느껴왔다. 그가 과거 받았던 시나리오는 열개 중 아홉이 좀 수상쩍은 프로젝트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훌륭한 원고가 많아졌다는 거다. “그 얘기를 아는 프로듀서에게 했더니, ‘그게 아니라, 예전에는 질 좋은 시나리오가 다른 배우에게 갔는데, 이제 너에게 들어가는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 또한 연기생활 10년 동안 점점 자신의 의자가 푹신해졌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와이프랑 그런 얘기를 해요. 이 정도까지 올라온 건 진짜 다행이다, 어떻게 조금만 더 하면 나중에 배우로 안 써줄 땐 장사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렇다고 정재영이 급비상에서 분출되는 아드날린에 취한 건 아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벽이 있다면 그건 일상인 것 같아요. 연기자는 생활이 연기에 투영되잖아요.” 그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있는 보통의 일상과 취미도 없는 게으른 성격이 배우로서의 모험심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몸부림치고 싶지도 않다. “만약 가족이 내 연기를 가로막아 더 나아갈 수 없다고 한다면, 그냥 연기를 포기할 거예요.” 그런 극단적 상황이 오겠냐마는, 그가 능력치를 업그레이드할 방도를 찾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창 밖을 슥 보던 정재영이 한마디 뱉는다. “저 밴? 저것도 나를 가로막는 벽 중의 하나죠.”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가죽 의자가 아니라, 어쩌면 스스로를 매질할 수 있는 가죽 채찍인지도 모르겠다.

의상협찬 지안 프랑코 페레, MSF, 휴고 보스, 스프링 코트, A/X·스타일리스트 신래영·헤어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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