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은 사진과 영화가 새로운 예술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기술복제시대에 예술이란 대체 어떤 것이 될 것인지를 질문했다. 우리는 아마 그와 유사한,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요구받고 있다. 생명복제의 시대에 생명체란, 혹은 그것의 삶이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이는 복제된 것, 복제된 생명체의 타자성에 관한 질문이다. 우리가 복제하거나 변형해서 만들어진 생명체를 우리는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까?
가령 인공수정이나 유전자 복제를 해서 ‘만들어진’ 생명체가 ‘기형아’일 경우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생명체임을 존중하여 그대로 태어나게 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이후 힘겨운 삶을 그대로 짐지게 하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역시 힘겨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 힘든 삶을 방지하기 위해 태어날 기회를 박탈한다면, 그것은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우리 뜻대로 처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이 그의 삶을, 그의 생명을 진정 존중하는 것일까?
<프랑켄슈타인>은 이미 이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이 만들어낸 생명체의 끔찍한 형상에 놀라 그를 버린다. 그러나 폐기되지 않고 살아난 그 ‘괴물’은 한편으론 그렇게 만들어낸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에게 삶을 제공한 그 ‘아버지’에게 애정을 갖고 또 그의 애정을 욕망한다. 그런데 만약 처음부터 실험실에서 암에 걸려 죽을 운명을 갖도록 조작되어 태어나는 온코마우스라면 어떨까? ‘실패’로 규정되어 ‘폐기’를 기다리는 실험실 폐기장의 수많은 생명체들이라면? 혹은 여러 가지 상이한 유전자들이 섞여 만들어진, 그러나 원래 기획된 ‘용도’에는 맞지 않는 새로운 생명체들이라면? 이들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낸 인간을 원망하며 죽음을 선택할까? 아니면 그렇게 주어진 삶을 긍정하며 살아갈까?
어찌됐건 그렇게 만들어진 생명체를 우리 자신의 뜻에 따라 폐기하거나 죽여버리는 것은, 그들이 자기 나름대로 존재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그들이 우리의 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임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휴머니즘 덕분에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은 채, 그렇게 수많은 동물들을, 수많은 배아들을, 수많은 생명체들을 죽이고 폐기한다. 그건 모두 ‘실패작’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휴머니즘을 벗어나서 그들이 존재할 권리를, 그들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권리를 인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기형이나 괴물의 고통스런 삶을 떠맡기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사실 이 질문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그렇듯이 그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그 역시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 동등한 존재임을 긍정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그를 긍정할 수 있었다면 그의 삶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이유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질문은 어떤 공포의 표현이라고 해야 적절할 것 같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우리의 의지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사태에 대한 공포, 혹은 복제된 생명체가 갖는 타자성에 대한 공포. 영화 <갓센드>는 바로 이런 공포를 다루고 있다. 내가 원해서 복제한, 죽은 아들을 그대로 뺀 복제물. 그러나 그 복제물이 나의 의지에서 벗어난 존재일 수도, 타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순간, 그는 거대한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타자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타자들이 내 뜻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갓센드>만은 아니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인간이 할당한 자리에서 벗어난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이나 장기를 제공하고 곱게 죽기를 거부하는 <아일랜드>의 복제인간이 복제물의 타자성을 표상한다면, 그를 처형하려는 인간들은 그 타자성을 부정하는 우리 자신을 표상한다. 나의 뜻, 우리의 의도, 인간의 의지에서 벗어난 것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손안에 넣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살아가게 하려는 욕망이 이런 영화들 속에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손에서 벗어난 땅은 ‘황무지’라고 부르고, 자기들의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적’이라고 폭격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 역시 정확하게 그 타자성에 대한 공포 아닌가! 그 공포를 넘어서는 것, 타자들의 타자성을 긍정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생명복제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윤리의 방향 아닐까? 단지 생명복제에 관한 것만은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