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클래식]
이장호 [40] - <어둠의 자식들>과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2000-01-18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오케이를 부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광화문에 국제극장이라는 우리 영화 역사에 꽤 중요한 영화관이 있었다.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해 영화인들이 광화문에서 집회를 할 때 자주 사용했던 감리회관 앞 넒은 공간이 바로 국제극장 앞이어서 아직도 영화인과 인연을 맺고 있다. 이 극장은 당시에 동아흥행이라는 영화사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소유주가 재일동포였다. 지금 낙원동의 허리우드극장 역시 그의 소유다. 나는 데뷔 시절 이 영화사와 계약을 맺었는데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대마초 사건에 휘말려 4년이나 이행하지 못했고 다시 활동을 재개하면서 작품 선택으로 차일피일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결국 <어둠의 자식들>과 함께 시한부 제작에 걸려들고 말았다. 3개월의 시한부였지만 두 작품 모두 시나리오가 완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둠의 자식들>의 경우 스토리라인을 따라 굵직하게 장면구분만 해놓고 촬영현장에서 대사와 동작을 만들어 나갈 때가 자주 있었다. 그나마 구로공단 갱사건을 다룬 영화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는 그럴 틈도 없어 촬영현장에 도착하면 조감독들이 준비한 대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더이상 돌지 않았다.

<어둠의 자식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연출부가 두 시스템으로 나누어 <어둠의 자식들>은 배창호와 신승수가 조감독이었고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는 선우완과 장영일, 그리고 시나리오를 쓴 장만철이 현장을 리드했다. 예를 들어 <어둠의 자식들> 촬영현장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 새벽이 밝으면 어느새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의 제작부가 기다리고 있다가 데려가는 식이었다. 몸이 차에 실리자마자 깊은 잠에 골아떨어졌다. 촬영현장 사이를 오가면서 몸을 옮기는 동안이 유일한 수면시간이었다. 그것으로 육체적인 한계는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괴로운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인 줄 뻔히 알고도 대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레디 고를 불러야 하는 일이었다. 틀림없이 실패하는 연출인 줄 알면서도 수면 부족이어서 그런지, 한계에 도달해서 그런지 뾰족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좋은 아이디어가 고민없이 그냥 술술 나오는 체질이 아니었다. 내 생애를 통해 가장 심한 갈등과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오죽하면 멀쩡했던 손톱이 영양 부족처럼 비틀려 자라고 있었을까.

이렇게 절망적으로 쫓기면서 촬영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나는 충동적으로 탈출을 기도했다. 가족을 이끌고 몰래 서울에서 도망을 쳤다. 모든 일정을 펑크내고 막연히 남한 일주를 바라면서 훌쩍 자동차여행을 떠났다.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마치 생을 포기하는 사람처럼 무책임해지고 싶었다. 딸과 아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즐거운(?) 가족여행 속에서 전화도 편지도 남기지 않았다. 뒤에 알게 되었지만 두 영화사 모두 난리가 났다. 한 영화사는 제작부장이 촬영조수와 함께 실제로 연고지를 찾아 나섰고 다른 영화사는 조감독을 시켜 행방을 찾기에 부심했다. 조급한 나머지 시한을 정해 더이상 나타나지 않으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정작 겁을 먹어야 할 본인이 없었으니 속수무책이었다. 일주일간의 남한 일주를 끝내고 강원도를 끝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동안 식은 머리는 겁도 나지 않았다. 마음속은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는 버리고 하나만 건진다,로 명쾌했고 <어둠의 자식들> 시나리오의 후반에 대한 아이디어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나는 두 제작사를 재빠르게 수습한 뒤 완성일을 정해 카운트다운으로 촬영과 편집, 녹음 일정을 잡았다. 제작사를 안심시키고 다음날부터 촬영을 강행했다. 두 작품은 정말 촬영도, 편집도, 녹음도 모두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질을 우선하기보다는 기계적인 우격다짐의 일정이었다. 다시 말해 60년대와 70년대에 유행했던 ‘편집3일 녹음3일’의 공식일정이었다. 남산에 있었던 영화진흥공사 녹음실에 A스튜디오와 B스튜디오를 동시에 빌린 두 영화사 제작부는 나를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게 하면서 두 작품의 믹싱을 동시에 끝내게 했다. 결과는 <어둠의 자식들>은 빅 히트를 그리고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는 빅 참패를 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제작에 신중을 기하는 기획자 중심의 시스템에선 정말 어림도 없는 황당한 얘기가 마치 무용담처럼 무모하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제작을 강행하는 기획을 그때는 왜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99% 실패지만 1%라는 요행을 바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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