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흥행 1위 <은하수를 여행하는…> 예술영화상영관으로 직행 단관 개봉
극장 근처도 못가보는 화제작들 많아 소극적 배급·관객 편식에 다양성 위축
최근 할리우드 흥행작들 가운데 한국에서 단관 개봉을 하거나 개봉도 못한 채 디브이디 시장으로 직행하는 작품이 줄을 잇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 영화 가운데 할리우드 영화와 유럽 영화로 흥행 기대치가 갈렸지만 이제 할리우드 영화 안에서도 ‘한국인의 입맛’이라는 잣대가 좁게 적용돼 상당수의 할리우드 상업영화들조차 개봉기회를 놓치면서 다양한 영화를 볼 기회가 더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말 미국에서 개봉돼 주말 흥행 1위를 차지했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오는 26일 예술영화상영관인 필름포럼에서 단관 개봉한다. 할리우드 흥행작이 한국 시장에서 저조한 성적을 낸 경우는 적지 않지만 이 작품처럼 예술영화관으로 직행한 영화는 없어 이례적이다. 디즈니 계열사인 브에나비스타가 배급한 이 영화는 미국 개봉 당시 높은 수익을 거뒀을 뿐 아니라 평단의 반응도 좋았던 영화다. 그러나 한국에서 흥행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개봉이 불투명해졌다가 필름포럼을 통해 예술영화 대접을 받으며 가까스로 스크린 빛을 보게 됐다.
<은하수...>는 ‘철거 직전’의 지구에서 탈출한 지구인과 외계인들이 우주를 떠돌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엮은 에스에프 코미디이다. 1978년 영국의 라디오 드라마로 처음 만들어졌다가 열광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소설과 텔레비전 드라마, 게임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소설은 에스에프 걸작에 수여 되는 휴고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깨는 플롯과 지적, 철학적 농담이 버무려진 ‘썰렁한’ 유머, 한국 시장에서 유달리 대접을 못 받는 에스에프 장르라는 이유 등으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 것이다.
<은하수...>가 비록 단관이나마 개봉 기회를 잡은 반면, 개봉조차 못 하고 디브이디 시장으로 직행한 화제작들도 많다. <로얄 테넌바움>의 웨스 앤더슨 감독이 만들고 올해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올랐던 <스티브 지소의 해저생활>과 주드 로, 마크 월버그, 더스틴 호프만, 이자벨 위페르, 나오미 왓츠 등 출연진 목록만으로도 궁금증을 일으킬만한 <아이 ♥ 허커비>, <레인맨>의 베리 레빈슨이 감독했고 벤 스틸러, 잭 블랙이 주연한 <엔비>도 미개봉인 채 디브이디 시장으로 직행했다.
네편의 영화는 모두 코미디 장르로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 유머 감각’이 개봉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됐다. 그러나 2~3년 전이라면 출연 배우의 이름만으로도 극장행이 어렵지 않았을 작품들이다. 극장 흥행수익이 좋지 않더라도 이를 보완할 만한 부가판권, 즉 비디오 시장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소니픽처스코리아 홈엔터테인먼트 사업부의 구창모 상무는 “3년 전만 해도 극장 개봉만 하면 비디오가 평균 1만장 이상 팔리면서 극장의 마이너스 수익을 상당부분 보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웬만한 흥행작이 아니면 디브이디가 1천장도 판매되지 않아 극장에서 실패할 경우 손해를 줄일 완충장치가 없다”면서 “‘안전한’ 작품이 아니면 개봉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흥행작이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홍보와 프린트 제작 비용을 줄여 소규모 개봉을 하거나 이조차 불확실할 때는 아예 개봉을 포기하고 1천장 미만의 디브이디와 비디오를 출시하는 ‘(돈)안 쓰고 안 벌기’식 소극적 배급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소니픽처스의 <아직 멀었어요?> 역시 올초 미국에서 흥행 1위에 올랐던 영화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개봉일정을 못 잡고 있다. 랩퍼 출신의 아이스큐브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로 한국에서 유달리 인기가 없는 ‘흑인영화’이기 때문이다. 올해와 지난해 한국에서 개봉하지 못한 미국 흥행 1위작 5편 가운데 4편이 흑인이 주인공인 드라마로 이 역시 “흑인이 주인공인 데다 액션까지 없으면 시장에서 죽는다”는 한국 영화시장의 불문율 때문에 극장에 도착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