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하다. <웰컴 투 동막골>과 같은 영화의 평을 쓰는 일은 노심초사, 그 심정에 가깝다. 우선 난 어른을 위한 동화와 같은 장르가 종종 성년의 동심을 일깨우기보다는 오히려 어른을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렇게 희비극을 오락가락하는 영화는 진지 모드로 정색을 하고 써나가기도 어렵고 , 희희낙락으로 일색하기도 어렵다. 더욱 난감한 것은 이 영화의 예의 희비극성이 역설을 자아내고 삶의 패러독스를 실감케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처럼 노골적으로 역설적 환영인사를 하는 예가 아니라면 난 이러한 영화의 장르적 관행 속으로 흡인되는 것을 좀 불편하게 여긴다. 모든 것이 내겐 언웰컴으로 들리는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라. 남동철 편집장은 이 영화를 특별 언급할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여기는 태세로, 한번 써보면 어떻겠냐며 권하고 있고, 현재 시사 뒤의 반응도 영화사로 보아서는 ‘웰컴’ 분위기인 듯싶다.
다른 한편, 매우 바쁜 전영객잔의 정성일, 허문영 협객들은 미지의 암기와 묘수를 준비하느라 이번주는 도무지 여념이 없다고 알려왔고…. 그렇다고 매주 연달아 <친절한 금자씨>만 써댈 수도 없지 않은가? 아, 여름 블록버스터의 불친절함에 몰린 영화평론가의 불안이란…. 여하간 이런저런 사연으로 이번주 전영객잔 문을 열어 ‘웰컴 투 전영객잔’을 외쳐야 할 사람이 다름 아닌 내가 되었으니….
이제 투덜대기를 멈추고 동막골로 들어가보자.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 태백산 골짜기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동막골, 아이들처럼 막살라는 뜻을 지닌 이 마을이 갑자기 붐비기 시작한다. 북한군과 남한군만이 아니라 연합군인 미국군까지 한꺼번에 동막골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여일(강혜정)의 삶의 때가 새겨져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순진무구’한 얼굴과 흰나비들을 보게 되는데, 바로 그녀, 그들과 크로스 커팅되는 것이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스미스(스티브 태슐러)다. 동막골의 갑작스런 소음과 사건으로서의 스미스는 이 영화의 제목에 활용된 웰컴에서 자명하게 밝혀지듯 영화가 말걸고 있는 주대상이다. 한국전쟁 당시 남과 북의 대결이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침윤되지 않은 동막골 사람들의 순박함에 의해 일시적으로 와해된다는 것은 상상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러나 스미스의 존재는 이 영화에서 일종의 돌출이다. 영화 안에서 연기를 통해 그의 존재가 특별히 두드러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적 배열에서 그는 이질적 얼룩이다. 바로 이 이질성 때문에 <웰컴 투 동막골>은 남북한의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인본주의로 극복할 수도 있다는 기존의 많은 문학, 영화 작품들과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낸다. 신하균, 정재영, 강혜정과 같은 매우 마음에 들게 연기하는 배우들이 국군, 북한군, 순박 소녀로 출연하는 가운데 연합군 스미스는 영어를 할 때조차 어색하고 튄다. 이 튀는 존재, 스미스가 근처에 추락하면서 동막골에 결정적 위기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스미스의 가짜 눈물의 공포
내가 이 스미스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고 수상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연합군이 이 동막골 주변에 암약하고 있는 적군이 있다고 오판하는 바람에 공습을 가해오자 ,북한군 리수화(정재영), 장영희(임하룡), 서택기(류덕환)와 국군 표현철(신하균), 문상경(서재경) 그리고 스미스가 새로운 대안 “연합군”을 구성한다. 그리고 동막골 주민을 살리기 위해 눈덮인 이웃 계곡으로 간다. 가던 도중 스미스에게 혹시 이 작전이 실패하면 연합군에게 상황을 설명할 사람이 있어야 주민들이 무사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동막골로 돌려보낸다. 이 신‘연합군‘은 처음엔 대공포로 연합군의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등의 활약을 벌이지만 결국은 전투기 대열이 쏘아대는 집중 포화에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바로 이 장면에서는 처참한 죽음의 순간이 포착되는 대신 이들을 감싸안듯 에워싸는 대규모 화염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러한 재현의 방식 때문에 이 죽음은 더욱 희생적이고 고귀하며 숭고한(the sublime) 것으로 보여진다. 문제는 그 다음 숏이다. 동막골로 돌아가던 스미스는 집중 포격 소리를 듣고 이들의 숭고한 죽음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영화가 내내 끌어내고 있던 연민에 가까운 감정의 초절정, 그 하중이 온전히 스미스에게 실리는 순간이다. 나는 영화 서사의 이러한 무게중심의 변화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러나 극장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몇몇 여학생들이 스미스의 눈물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영화적 재현에 대한 관객의 동일화 과정에 다소 충격을 받은 나는 여기에 몇개의 장면을 다중노출시켜 이 스미스군의 가짜 눈물의 공포를 설명하려 한다.
이 영화는 1950년 11월 강원도의 가상의 마을, 일종의 유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한국전쟁을 일으켰던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와해를 향해 가고 있지만, 당연히 이러한 역사적 장의 소환은 현재의 공공연한 판타지와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장 납득이 가지 않는 이 영화의 난처한 부분은 거듭 말하거니와 연합군 스미스다. 한편으로 연합군 스미스는 이 영화에 다른 남북한 화해 무드 영화와는 제법 다른 무드를 불어넣지만 영화의 서사 층위에서 보자면 불가능한 방향으로 금방 진화해버린다. 처음, 동막골에 도착해 상처를 치료받고,“하우 아 유? ”, “아이 엠 파인” 이상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 스미스는 방자한 태도로 신경질을 부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동막골에 동화되고, 동네 아낙들이 ‘핸드 메이드’한 자신의 몸에 맞는 커다란 한복도 선물받는다. 그리곤 심지어 마을 수비대로 자청해 연합군을 공격하러 간다. 탈영한 국군과 귀로를 헤아릴 길 없는 북한군이야 동막골의 인심에 감복해 자신의 목숨을 무릅쓴다고 해도, 미군이 자신의 아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이 영화를 우화로 간주하건, 어른을 위한 동화로 보건, 판타지로 대하건 간에 불가능한 상황 설정이다. 이 부분도 잘 설득이 되고 있지 않은 판국에, 남북한 군인들이 민간인 보호를 위해 집단 희생을 치른 뒤 다음 장면이 스미스의 눈물로 이어지고, 바로 그 눈물이 관객의 눈물을 촉발하는 것은 정말 가짜 눈물의 공포를 느끼게 한다.
내가 여기서 은근히 기대고 있는 것은 물론 슬라보예 지젝이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진짜 눈물의 공포’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진짜 눈물의 공포>, 슬라보예 지젝 지음, 오영숙 외 옮김). <첫사랑>이라는 다큐멘터리는 새로 태어난 아기를 손에 안고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키에슬로프스키가 ‘진짜 눈물의 공포’를 언급하는 것은 타인의 내밀한 부분을 허락없이 침투하는 외설성에 대한 반응이다. 그래서 그가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전환한 것은 윤리적 결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영화로서의 <웰컴 투 동막골>은 오히려 가짜 눈물의 공포, 즉 역사의 내밀한 부분을 침투해 가짜 눈물을 공유하게 하는 정치적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
순박한 영화에서 발견되는 순박한 정치적 순종
“웰컴 투 더 데저트 오브 더 리얼.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건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받은 메시지이지만 예의 슬라보예 지젝이 미국 9·11 사건을 다룬 책의 제목으로 전유한 것이다. 여기서 지젝은 <뉴욕탈출>이나 <인디펜던스 데이>과 같은 미국의 재앙영화들이 보여주었던 판타지가 9·11 무역센터 빌딩 파괴를 통해 현실화된 것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자신이 판타지하던 것을 얻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판타지가 현실화된 것이다.
나는 ‘웰컴 투 동막골, 동막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한국전쟁 시기의 어떤 공간을 호박등 켜진 동막골이라는 곳으로 판타지화하면서 스미스로 대표되는 미국인에게 웰컴이라고 말거는 양식 자체를 표제화하고 또 그 미국인의 눈물과 동일화해 관객이 눈물을 흘리도록 되어 있는 영화적 구조를 순박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영화가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북한 화해, 그것을 가능케 할 이데올로기 제로 지대로서의 동막골의 설정, 남북 양쪽 군인들의 희생 등, 이것이 가질 수 있는 상징적 중량감이 스미스에게로 건너가 종결되는 판타지 구조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남북한이 애써 꾸린 화해의 보따리를 연합군 미군에 넘겨주는 꼴인 것이다. 증후로서의 이러한 판타지는 현재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6자회담에 대한 순순한 내면화로 은근슬쩍 해석해도 될까? 이 영화에 순박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포스트 냉전 이후 세계화를 주도하는 미국에 대한 무의식적 정치적 순종에서 나오는 소심함이다.
이 순박한 영화를 뭐 그리 복잡하게 보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나올 수 있다. 한여름, 공해없는 무릉도원, 청량한 어떤 곳을 그리워하는 소망을 동막골이라는 세팅을 통해 충족시켜주는 피서용 영화 아닌가요? 게다가 환영한다지 않아요? 맞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질문은 “그 무릉도원에 스미스는 왜 있는 거야요?”(여일의 강원도 사투리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