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불안한 일상의 판타지 소녀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2000-01-11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글 : 김혜리
B와 H기자가 이야기하는 <여고괴담…>, 10대 '여성'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시사회장. 무서운 영화를 내심 몹시 겁내는 한편 청춘 영화라면 자다가도 솔깃한 <씨네21> 기자 H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불이 꺼지고 소녀들의 일기장이 펼쳐지자 H는 한번 더 당황했다. 필름이 돌아갈수록 ‘속편’이라는 문패 앞에 은근히 그려봤던 상상도는 무안하게 구겨지고,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훨훨 날아가는 게 아닌가. 울고 웃고 두근대다 보니 어느새 영화는 끝났고, H는 미처 감상도 수습 못한 채 오로지 한때 여고생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여고괴담..> 기사를 떠맡고 말았다.

하지만 기사를 넘긴 다음에도, 관객들의 논란을 구경하고 감독을 만난 후에도, H는 체증에 걸린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연말연시를 뒤숭숭하게 보낸 그는 마침내 결론을 냈다. 그래, 이 영화는 내게 지나치게 가까운 거야. 그래서 사방을 분별할 수 없는 거구. 이럴 때는 한바탕 떠드는 게 최고인데, 투덜투덜. 애타게 말벗을 찾던 H는 평소 존경해 온 선배 B가 <여고괴담..>를 재미있게 보았다더라는 소문을 접하고 좋아라 자리를 청했다.

2편이 엉뚱하니까 속편도 가능하겠지

H: 만약 영화들한테 하나씩 무덤이 있다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묘비명은 “모든 것은 제목 때문에…”가 어떨까요. <여고괴담..>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제목을 배신했다고 성을 내고, 마음에 들어하는 관객은 ‘괴담’이라는 제목이 안 어울리는 상업적인 옷이라고 불편해 하니까요.

B: 공포 장르의 약속이 무너졌다고 화를 내는 거지. 그런데 따지고 보면 <여고괴담> 1편도 장르 영화로서는 뛰어난 편이 아니었거든. 공포의 장치들이 단순하고 관습적이지. 하지만 자살을 교사하는 경쟁, 학교-학생 대립구조를 생생히 그림으로써 “나라도 선생을 죽이고 싶다”는 공감을 불러왔고 무서움을 가중시켰지. 전편이 보여 준 ‘거창한’ 리얼리티를 기대한 이들도 불만일 거야. <여고괴담..>의 리얼리티는 아주 ‘미세한’ 리얼리티잖아. 분노는 전편보다 확실히 더 느껴졌어. 1편의 분노가 규격화, 정형화된 분노라면 2편의 분노에는 개인마다 다른 이유가 있지. 사실 그래. 어떤 체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게 자기를 어떤 식으로 방해하고 억압하느냐가 분노의 대상이잖아.

H : 역설이지만 <여고괴담..>이 ‘엉뚱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오히려 이로써 3편, 4편이 가능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신의 폭이 좁은 제목을 지닌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가 1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생산적인 연작으로 수명을 이어갈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할까요. 물론 2편의 흥행 추이가 현실적 관건이겠지만.

B : 만약 1편의 요소를 그대로 끌어다 속편을 만들었다 해도 장르적으로 뛰어난 공포 영화가 나오긴 힘들었겠지. ‘여고괴담’이라는 이름의 스펙트럼은 엄청나게 넓기 때문에 이야기는 수도 없이 나올 수 있을 거야.

H : <여고괴담..>은 우선 우리 영화의 취약점인 일상적 리얼리티의 재현에서 뛰어났죠. 벽에 신사임당 초상화가 걸려있는 전편의 교실이 우리들 언니 세대의 학교였다면, 상식적인 교사와 캠코더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 사는 2편의 환한 교실은, 지금 10대에게 보다 친숙한 동생 세대의 학교처럼 보였어요. 교육 상황이 암울한 건 사실이지만, 살아서 그 ‘사막’을 건넌 대부분 아이들은 좋았던 일을 더 많이 기억하죠. 어쩌면 학교를 온통 비극의 도가니로 기억하는 건 효신이처럼 사막에서 타 죽은 애들 뿐인지도 몰라요. 하긴 <학교>처럼 비교적 현실적인 TV 드라마도 나온 상황에서 전편의 세팅을 되풀이했다면 맥이 풀렸겠지요.

B : 1편은 80년대 학번의 영화라고 해야겠지. 80년대 학교를 희화화한 PC통신 연재물을 책으로 묶은 <구타교실>을 보면 알지. 고교 교사인 친구 말에 의하면 때리거나 강권한다고 말을 듣는 아이들은 이제 없대. 한 학년만 내려가도 분방함이 몇 배나 더하고. 리얼리티를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제일 공들인 대목은 인물의 세부묘사 아닐까. 특히 조연들이 효신이 죽은 후 강당에서 다투는 모습에선 죽음에 대한 상반된 감정들이 생생하잖아.

H :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한없이 무감해지는 10대 소녀들의 불안정한 감성이 살아있죠. 예컨대, 혼이 나간 민아가 피아노를 치다가 효신이 꾸며놓은 장식물을 발견했을 때 표정을 봐요. 그 와중에서도 공포가 아니라 “와, 예쁘다”하는 감탄이 먼저인 것이 아주 사실적이죠. 단짝 중 덜 사랑하는 쪽의 무심함도 잘 그려졌어요. 효신이 기껏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면 시은은 “나도 너랑 안 노니까 심심했어” 쯤으로 응대하는 대목이 그렇죠.

B : 민아는 효신과 시은의 관계를 부러워한 게 아닐까? 그런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상대에 대한 그리움은 어떤 아이에게나 있는 것이고. 효신과 시은에 대한 따돌림도 자기가 못 가진 것에 대한 질투로 볼 수 있지. 공공 장소에서 입맞추면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카페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을 봐. 그럴 때 카페 주인들은 아예 못 본 척하거나 마구 야단치거나 둘 중 하나잖아? 반 아이들의 재수없다는 야유도 자기들이 가질 수 없는 걸 소유하고,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은 둘에 대한 질투 아니었을까? 효신과 시은이 교실에서 키스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둘을 싸고 맴돌면서 그 공간을 독립적으로 분리시켰지. 현실에서 일탈된 환상처럼 말야. 현대 사회에서 동성애는 판타지의 일부니까.

H : 성장 영화로서 <여고괴담..>이 발딛는 좌표도 동성애의 모티브와 얽혀 있어요. 수많은 할리우드 청춘 영화에서 성적인 눈뜸이 차지하는 비중을 봐도 명백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성장은 동성애적인 유대를 끊고 이성애적 관계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잖아요. 효신은 그런 성장, 혹은 거짓화해를 거절하고 죽음으로 뛰어든거구. 성장이란 축적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갖고 있던 것을 버리고 살해한 다음, 자기가 혐오하던 속성들을 피와 살 속에 받아들이는 일이죠. 그래서 효신은 죽음을 통해 이승에서 성장을 멈추고 딴 세상에서 태어난 것이고, 시은이 옥상에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에 효신이 부르는 생일 축하 노래는 환영사로 들려요.

B :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그린 영화들이 스스로 깨지면서 세상의 벽을 알아가는 이야기라면, 청춘 영화는 세상을 알긴 알았는데 거기에 어떻게 대응할지 좌충우돌하는 영화라 흥미로워. 성장 영화는 기본적으로 막혀 있는 영화지. 문제는 학교가 사회보다 더 억압적일 것도 없고, 성장을 해도 똑같다는 점이야. <여고괴담..>에서 감독들은 커뮤니케이션이 있다고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난 솔직히 두 사람 간의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해도 얼마나 현실적인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가 들어.

10대 ‘여성’, 그들만의 세상

H : 만듦새는 어땠나요? 초반부에는 사실 환상과 현실, 과거와 미래를 구별하기 쉽지 않죠. 내러티브의 혼란을 두고 신인의 미숙함이냐 의도적인 불균질함이냐 관객들 의견이 엇갈리고 있구요. 공포 영화로서 어떻게 보셨는지도 궁금하네요. 죽은 효신이의 시점 쇼트나 영혼이 민아 몸을 더듬는 장면, 마지막 클라이맥스 연출은 겉도는 느낌이었어요.

B : 전반부로부터 끌어온 인물 이야기가 후반부에서 장르의 관성과 충돌하면서 좀 썰렁해졌지. 죽은 효신이 민아에게 달라붙어 애들에게 분풀이하는 것도 우리가 본 그 애의 성격과 잘 안 맞는 느낌이고. 상징 이미지를 곳곳에 너무 빽빽히 깔아놓은 것도 영화를 붕 떠보이게 하는 역효과를 낳은 것 같아. 효신이와 고선생 관계의 성격도 설명이 부족했지.

H : 전편의 가학적 교사를 기억하는 관객들이 고선생을 감독 의도대로 효신이의 친구로 보지 않고 가해자로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망자가 다시 살아난 이미지는 <화니와 알렉산더>부터 수없이 쓰였는데도, 죽은 효신이 마치 자기가 죽은 줄 모른다는 듯 시은과 의좋게 지내던 시절처럼 우유 두 개를 달랑거리며 내려왔다가 교실이 텅 빈 걸 보고 실망해서 돌아가는 장면은 이상하게 마음에 남더군요.

B : 원망과 분노가 쌓인 상태에서 죽은 사람은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 못하고 죽기 전 상황을 되풀이한대. 시은이가 “나 이제 우유 안 마셔”라고 내뱉은 순간이 실상 효신의 죽음이 시작된 순간이었으니까 영혼도 그 상황 속으로 돌아간 거겠지.

H : 감독들은 인터뷰에서 소녀나 여고생 대신 10대 여성이란 표현을 즐겨 썼어요. 청소년 문화 내부의 성차에 주목한 <여고괴담..>은 성장 영화이면서 젊은 여성 영화이기도 하죠. 실은 10대를 제대로 주시한 성장 영화 자체가 드문 상황에서 좀 앞질러 나간 감마저 있네요. 흔히 업신여김받는 오빠 부대나 소녀들의 교환일기도 소년들의 폭주 못지 않게 획일화된 문화 속에서 자기들만의 ‘돔’을 세우려는 몸짓이죠. <나쁜 영화>처럼 사실성을 평가받은 10대 영화에서도 여자애들은 궁극적으로 남자 또래들의 보조역으로 보인 것이 사실인데, 여고라는 한정된 공간은 그들 문화의 속성을 더 세밀히 들여다보게 해주었어요.

B : 어쨌거나 남자가 끼면 아무래도 로맨스로 흐르기 쉬우니 여고는 여성 자체를 말하기 좋은 무대지. <여고괴담..>의 장점은 강한 여성을 보여준다는 거야. <델마와 루이스>를 욕하는 사람들은 왜 남자와 똑같은 폭력을 쓰냐고 하는데, 폭력을 좀 쓰면 어때? 진정으로 강인한 여성 캐릭터는 더 많아야해. <여고괴담..>은 비록 죽음으로 끝났지만 자기만의 이유와 원칙을 갖고 살려는 여성을 그렸다고 할 수 있어. 그 죽음도 지금껏 볼 수 없던 여성 캐릭터의 당당하고 강력한 의사 표현이었고.

다른 기획에는 다른 전략이 필요해

H : 그런가하면 <여고괴담..>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틈에 지금까지 우리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솔직한 태도로 동성간의 연애 감정이나 관능적인 접촉을 자연스럽게 녹여서 표현한 영화예요. 그것이 교묘한 전략이었든, 거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해 무심한 결과였든 말이죠. <여고괴담..>은, 성인이 된 후 최종적 성적 지향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한테 숨어있고 성장기에 한번쯤 경험하는 단계로서 동성애를 그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겠죠.

B : 우정과 애정 사이에 명확한 금을 그을 수 있나? 지금까지 동성애 영화들은 ‘동성을 사랑하게 됐다. 그런데 체제 때문에 그 사랑이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앞세워 왔는데, 좀더 일반적 접근법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말하자면, 내가 왜 이 인간을 사랑하게 됐는가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그가 동성이라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은 순서일 수 있다는 거지.

H : 그러고 보니 <여고괴담..>은 한 영화가 기획, 제작, 수용의 각 국면을 거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균열이 거기서 얼마나 다채로운 의미들이 발생하는지 보여주는 사례 같기도 하네요. 10대 여성, 신인 감독과 배우, 공포 장르 등의 소외 영역들을 살려낸 미덕도 무시할 수 없죠.

B : 결과물을 보면 제작자는 흥행 영화보다 ‘여고괴담’이라는 제목 안에서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를 구상한 것 같은데, <에일리언> 시리즈 바톤을 데이비드 핀처가 이어받아 휘저어 놓았듯이 말이지. 그랬다면 마케팅 전략도 과거와 달랐어야 하지 않았을까. 여성 영화로 컨셉을 잡아 20대까지 끌어들였으면 어땠을까. 제작비를 낮추고 스타일이 강한 신인들을 발굴하면서 시리즈를 이어간다면 팬 집단도 형성될 것이고, 한국영화사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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