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클래식]
이장호 [39] - 이장호 사단이 형성되다, <바람불어 좋은 날>
2000-01-11
<바람불어 좋은 날> 이후 내 주변에 새로운 영화 패거리들이 모여들다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은 내 주변에 새로운 영화 패거리들을 끌어 모으는 또 하나의 좋은 바람잡이가 되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명보극장엔 의욕에 찬 젊은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는데 조감독이었던 배창호와 신승수는 물론 당연했고 재야 운동권의 장선우(본명 장만철)가 <바람불어 좋은 날>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서울고등학교 후배로 내동생 영호와 동기동창이었다. 또 이미 영상시대에서 인연을 맺었던 김홍준이 매일 빠지지 않고 극장에 들리더니 서울대학교의 영화 서클 얄라셩의 멤버 박광수 등을 바람몰이로 몰아와 그때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훗날 프랑스에서 만나 내 조감독이 되었다. 그들의 8mm영화를 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서툴면서도 신선한 아마추어의 비린내 같은 느낌은 훗날 내 영화 <바보선언>의 중요한 아이디어가 되었다.

편집광적 기질이 다분한 김홍준은 틈만 나면 어두운 극장 안에 잠입해 <바람불어 좋은 날>을 무려 30회 이상 감상했다. 또 당시 극장의 기획실장을 맡고 있던 김정률씨와 나는 의기투합하여 <바람불어 좋은 날>의 관객 혹평을 공개모집 했는데 그때 우수 혹평에 당선된 학생 중에 서울대학의 황규덕이 있었다. 지금은 이들 모두가 감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매우 중요한 영화사적 존재가 되어 이름을 높이 알리고 있는 가운데 극영화 감독은 아니지만 한국독립영화협회 회장인 김동원, 또 잠시 내 조감독을 하다 중도하차했던 전통 뒷간 연구가 홍석화, 그리고 내 영화 시나리오를 두 편이나 집필했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했던 연극 연출가 겸 판소리꾼 임진택, 국악인 김영동 등도 있다. 이렇게 새로운 재능들이 일시에 매력을 느꼈던 영화가 바로 <바람불어 좋은 날>이었다. 훗날 고백을 들었지만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도 이때 <바람불어 좋은 날>을 보고 영화감독이 될 마음을 굳혔다고 했다. 이외에도 극장 앞에서 늘 만나는 얼굴 중엔 이제 막 성인이 되어 다시 부활하는 아역 출신의 배우 안성기와 얼마 전에 안타깝게 고인이 된 김성찬, 그리고 여배우 김보연, 내동생 이영호, 또 그밖에도 아직 알려지진 않았지만 새영화에서 새롭게 연기하려는 새로운 신인들이 찾아들면서 이른바 충무로 기성 영화판의 곱지 않은 눈에는 아니꼽고 시건방진 이장호 사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다음 만들 영화로, 계간지 중앙문예에 작가 황석영씨의 이름을 빌려 발표된 현장소설 <어둠의 자식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실제 원작자인 이동철(본명 이철영) 역시 빠지지 않고 극장에 나타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는 아직 내가 모르는 재야운동권의 골수들을 끊임없이 내게 소개했는데 가장 인상에 남는 이가 바로 도시빈민 선교로 봉사하고 있던 허병섭 목사였다. 이동철에게 신앙의 눈을 뜨게 한 장본인이다. 그 분이 하루는 수줍은 말투로 좋은 영화만 있다면 극장이 바로 교회의 역할을 하므로 목사가 따로 필요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싹텄다. 그리고 실제로 그후 <어둠의 자식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바보선언> <과부춤> 등 계속해서 내 영화에는 허병섭 목사가 던진 기독교적 화두가 깊이 작용했다. 나에게 있어 일종의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어느 한 작품도 평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대종상 후보에서 늘 제외되었는데 그때는 문공부와 영화진흥공사가 대종상을 직접 주관했고 정부의 간섭과 통제가 거세던 때였다. <어둠의 자식들>과 <과부춤>은 검열과 함께 해외수출 불가 판정까지 받았다. 그러나 후에 일본에 16mm프린트가 나가 의외의 호응을 얻었고 이 반응이 다시 역수입되어 80년대 말이 되어 젊은 평론가들에 의해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1981년부터였던가? 영화판은 소위 시행령에 의한 시한부 제작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극영화 제작사는 일년을 4/4 분기로 나누어 3개월에 한 편씩은 의무적으로 영화를 만들어야만 하는 반강제의 억지 제작에 목을 걸었다. 그래야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배정 받을 수 있었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였다. 나는 불행하게도 같은 분기에 각기 다른 회사에서 두 편의 영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대마초 사건 전에 이루어졌던 계약 때문이었다. <어둠의 자식들>과 다른 하나는 실제로 1974년에 있었던 구로 갱단 사건의 주범 이종대와 문도석 일가족의 자살 사건을 다룬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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