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화난 목소리로 여자에게 사랑을 구걸한다. 여관방에서 자지러지듯이 웃으며 “사랑? 사랑?”이라고 조롱하는 여자. 이후 욕지거리와 난투극 끝에 남자에게 처참하게 교살당하는 그녀. 건조하고 차가운 롱테이크로 찍힌 <소름>의 선영(장진영)은 한국 영화사에 기억될 만한 기묘하고 강력한 팜므파탈로 남았다. 장진영은 네 번째 출연이며 첫 주연작인 <소름>에서 그렇게 배우로 다시 태어났다. 이 영화를 보면 그녀가 “촬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다”고 말하는 대목이 실감나게 와닿는다.
운명처럼 그의 여덟 번째 출연작 <청연>에서 그 연출자 윤종찬 감독과 그 배우 장진영은 재회했다. 저예산영화에 스탭들은 컵라면으로 연명하고 마지막 촬영날까지 제작비 조달에 허덕였던 <소름>. 강행군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청연>은 4개국 로케이션, 3년의 제작준비 기간, 촬영만 1년이 걸린 대작이다. 호사가들이 ‘충무로 3대 재앙’이라고 씹어대던 전장의 중심에서 두 사람은 이번에도 끝까지 카메라를 벗삼아 담담히 서 있었다. 표지촬영 현장에서 좋아하는 떡볶이를 오물거리는 장진영에게 <소름>과 <청연> 중 어떤 것이 더 힘들었느냐고 운을 뗐다. “<소름>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좀 기다리는 문제만 제외하면. 물론 <청연>은 <소름>과 비교할 수 없는 스케일로 빚어지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견디거나 참는 문제만으로는 당연히 <소름>이 훨씬 어려웠다”고 그는 답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한 기다림”을 장진영은 1년 동안 꽤 많은 책을 읽으며 메워나갔다. 특히, “중국 촬영 때 읽은 정약용의 산문집, 폴 오스터의 <공중 곡예사>,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반짝반짝 빛나는>의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에 그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 더욱 반짝반짝 빛난다.
지난 설에 방문한 찬바람이 몰아치던 <청연>의 목포 촬영현장. 강우기에 의해 바닥은 물바다로 변했고, 고드름과 칼바람이 현장을 감싼다. 어린 이정희(한지민)는 온몸을 벌벌 떨며 입이 얼어붙어 대사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 윤종찬 감독은 스무 테이크를 목전에 두고도 미동도 없이 다음 테이크를 준비했다. 여주인공 장진영도 태연하기는 마찬가지다. 치열하게 한 테이크를 마치고 담배연기 사이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윤 감독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물었다. “또 다른 느낌의 가족 같다. 묘하게도 나는 항상 100% 감독님을 믿는다. 윤 감독님은 나한테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고 답했다. 윤 감독의 아들 상훈에게 틈만 나면 그녀가 “매일 집을 비우는 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를 설명한다”는 일화나 “중국에서 내가 남자배우였으면 술집이라도 같이 다녔을 텐데 직접 음식 해드리고 한국에서 먹는 것 나른 게 전부”라고 안타까워하는 해외촬영의 상황은 두 사람 간의 신뢰를 엿보게 한다. 장진영은 “사람들과 몰려다니거나 자주 만나는 걸 싫어하고 자기 안으로 몰두하는 건 서로 닮았다”고 설명했다.
긴 여정 동안 촬영장에서 스탭들의 쏟아지는 시선을 여배우 혼자 견디는 일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큰일에 담담하고 특히 현장에서는 상황이라는 게 명확하다”고 장진영은 설명한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참아서 해결되면 참고, 화를 내서 해결된다면 화낸다. 원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감정적으로 어떤 건 개인적인 문제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건 스탭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를 걱정해준다는 기반에서다. 그 상황에서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면 그만큼 걱정과 불안만 가중될 뿐이니까”라고 덧붙였다. 원래 본인이 약간 ‘곰’과라서 그렇단다. 촬영하며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꼽으라니까 “부천에서 촬영할 때 겨울 배경으로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너무 넓은 공간이라 눈을 뿌릴 수도 CG로 채울 수도 없었다. 감독님은 눈이 뿌려지는 정경을 바랐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라. 엄청 예쁘게 그것도 찍는 시간에 딱 맞춰 내려줬다. <청연>은 1년 내내 날씨가 도와준 적이 없는데 유일하게 그날만 그랬다”라고 이야기한다.
아직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신작에 대해 언급하자,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는 재미없다. 숱하게 봐왔고 그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누가 해도 똑같다면 내가 할 의미가 없으니까”라고 시나리오 선택의 기준을 밝힌다. 그러면서 <펀치 드렁크 러브> 같은 러브스토리라면 언제나 OK라고 귀띔한다. “대작영화 중에는 여자 원톱으로 도전하는 첫 작품이라 잘못되면 나만 이런 경험을 해보는 걸로 끝난다”며 어깨가 무겁다는 장진영. 완벽주의자 윤종찬과 그의 페르소나 장진영이 두 번째 산고 끝에 만들어낸 <청연>은 12월에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