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쿵.쿵. 쿵쿵쿵쿵” 육중한 남자 발소리에 잠을 깬 건 새벽 3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습기차고 후덥지근한 늦여름 더위 때문에 계속 잠을 설치다 겨우 선잠이 든 순간이었는데, 이런 젠장 할…. 그 발소리는 현관입구에서 내 집 앞 복도를 지나 위층으로 향했다. 뭔가 화가 단단히 난 사람이 아니면 화장실이 너무 급한 사람에게서나 나올법한, 조급하면서도 격정적인 발소리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발소리’는 3층의 한 아파트 문을 쾅쾅 두드렸고, 안에서 대답이 없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와! 빨리 문 열지 못해! 이 $%@야!” 결국 포기한 듯 문이 열리자 ‘발소리’와 ‘3층녀’ 사이에는 격한 말싸움이 오갔고, 아파트 문을 닫고 들어간 이후에도 간간히 뭔가 던지는 소리 같은 것이, 누군가 맞아 넘어지는 소리 같은 것이, 그리고 분명한 ‘아아-악-!’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그들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여자가 바람을 피웠나? 돈을 떼먹었나? 그나저나 3층에 누가 살고 있었더라?
건너편 '창문들'에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어느 도시의 아파트가 그렇지 않겠냐만 맨하탄의 아파트 역시 같은 빌딩에 누가 사는지 알기는 좀 힘들다. 워낙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고, 출, 퇴근 시간도 제 각각이니 마주치는 경우도 그리 많지는 않다. 대신 열악한 방음시설 덕에 복도 넘어 들리는 목소리나 발소리 로 “누가 새로 이사 왔나 보군”하고 느낄 뿐이다.
그러나 코 앞 건너편 ‘창문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사정이 좀 다르다. 그들이 커플인지, 그녀가 독신인지, 그의 귀가가 늦은지, 그 아가씨가 파티-걸인지, 그 녀석이 얌전한 학생인지, 창문에만 서면 층층 아파트의 사연들이 마치 위성사진이라도 보는 듯 세세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키스신은 종종 있는 일이고, 운이 좋다면 포르노를 능가하는 라이브 섹스신도 감상 가능하다. 그러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4명의 친구들이 팝콘까지 준비하고 감상하던 ‘에너자이저 커플’의 에피소드도, 미란다가 건너편 창문의 게이남자와 벌인 귀여운 ‘스트립 쇼’ 도 과장이 아닌 셈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을, 그들의 일상다반사를 꿰뚫기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우리 집 건너엔 글을 쓰는 건지 인터넷 쇼핑에 빠져있는지 밤새 노트북 곁을 떠나지 않는 ‘캐리 브래드쇼’ 도 한 명 있고, 정육점처럼 붉은 불과 요상한 꼬마전구가 늘 깜빡거리는 ‘야시시 방’도 있다. 사실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불 켜기를 잠시 멈추고 어둠 속에서 건너편을 살피는 이유도 파리도 미끄러질 듯 반질거리는 아름다운 웃통을 잊지 않고 선보여주시는 8시 방향 남자의 ‘토르소 누드쇼’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관음행위는 내 방에 불을 켜는 순간부터 멈춰진다. 흥미진진한 영화감상은 끝나고 별 재미없는 3류영화의 주인공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건너편 누군가는 나를 보며 “저 아가씨는 오늘도 중국음식 딜리버리인가?” 하고 혀를 끌끌 차고 있을지도 모른다. 재미없는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선택은 한가지다. 저 아저씨, 과감히 커튼을 내린다. 하지만 가끔은 별 선택사항이 없는 경우도 있다. 히치콕 <이창> 의 제프리스 (제임스 스튜어트) 같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다리깁스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된 그에게 건너편 아파트 구경은 유일한 즐거움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스튜디오 안으로 그럴듯하게 옮겨놓은 50년대의 그리니치 빌리지의 풍경은 2005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와 제 각각의 뉴요커들. 대신 그 시대의 여름은 에어컨의 부재로 집집 마다 밤낮으로 창문을 열어두었으니 이 ‘동시다발 상영 영화관’의 관람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길었던 셈이다. 망원렌즈 카메라나, 망원경을 들고 늘씬한 아가씨의 ‘나 홀로 댄스 쇼’나 노처녀의 슬픈 저녁 식탁을 훔쳐보던 어느 날, ‘잠들지 않는 이 도시’의 ‘잠들 수 없는 그 사나이’는 살인사건 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갈수록 창문 너머 사건에 집착하게 되는데, 처음엔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던 여자친구와 주변사람들 역시 점점 그 살인사건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관음증과 영화보기’ 같은 심층적인 주제보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그의 여자친구로 등장한 그레이스 켈리의 관계 변화였다. 그들의 밋밋한 관계가 살인사건을 통해 어떻게 변해가는 가를 ‘훔쳐보는’ 것이 그 어떤 미스터리보다 흥미진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디 앨런의 <맨하탄 살인 사건>의 심드렁한 부부, 래리(우디 앨런)과 캐롤(다이앤 키튼) 역시 어설픈 탐정들이 되면서 생활의 새로운 기운을 찾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벌어진 옆집부인의 죽음. 캐롤은 유난히 좋은 금슬을 자랑하던 옆집 남편이 부인이 갑작스럽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순조롭게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을 지켜보며 남편이 부인을 살해했다고 의심하게 된다. 결국 누구도 고용한 적 없는 ‘사립탐정’이 된 캐롤은 점점 대담한(? 수사를 펼치고, 래리 역시 아내의 탐정놀이에 동참한다. 그렇게 간섭하지 않는 선에서 평화를 유지해오던 이 묵은 부부의 관계는 ‘맨하탄 노부인 살인사건’을 통해 진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신선하게 뒤섞인다.
기본 100년은 넘은 맨하탄 아파트들의 구비구비 사연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사건들이 터지는 뉴욕은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별로 놀랄 것이 없는 곳이다. (멀쩡하던 쌍둥이 빌딩까지 무너진 판국에!) 하긴, 페인트칠만 100번도 더했을, 기본이 100년은 넘은 맨하탄의 아파트들 하나 하나에 얼마나 구비구비 사연들이 많을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작은 스튜디오에서도 지난 한세기 동안 8000번도 넘는 섹스가, 500번도 넘는 파티가, 200번도 넘는 이별이, 몇 백 번의 싸움이, 몇 십 번의 강도사건이, 어쩌면 몇 번의 살인사건까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그날 밤 3층 여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비명소리가 지나간 후 한참 동안 귀를 쫑긋 세우고 위층의 상황을 체크하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던 것 같다. 만약 간밤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침 일찍 경찰이 들이 닥쳤을 것이다. 아니면 아직 발견되지 못한 부상당한 여인이, 혹은 죽은 시체가 조금씩 부패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러나 다음날 내가 눈을 뜬 시간은 잠을 설친 탓인지 정오가 훌쩍 넘어 있었다. 외출하는 길에 3층으로 올라가 상황을 살펴볼까 하다가 어쩐지 오싹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그만두었다. 역시 음험한 ‘피핑 톰’이 되기에도, 모범이웃이 되기에도, 추리소설 속 영웅이 되기에도, 맨하탄의 여름 밤은 너무 덥고, 아침잠은 죽음보다 달콤하며, 나는 너무 게으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