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이상한 나라의 동막골, <웰컴 투 동막골>
2005-08-31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판타지와 역사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판타지를 통해 대립된 남북을 소통시키고자 하는 전략은 그리 낯설지 않다. 이는 판타지가 무엇보다 상상적 합일을 이끌어내는 데 유용하고, 그런 면에서 이상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한 <천군>이 그러했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남북 군인들이 서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퇴행적 판타지’를 차용한 바 있다. 20대 청년들인 그들이 함께 어울리는 놀이는 자신들의 나이를 벗어난 행위들, 닭싸움을 하고 포르노 잡지를 나눠보고 연예인 사진을 공유하는 것이다. 남북 군인들이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나 소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청년에서 소년으로 성장의 시간을 되감으며 만들어낸 퇴행적 정서였다. 하지만 그들이 현실의 상징적 위치를 재인식하는 순간, 달리 말해 퇴행적 판타지에 냉정한 현실이 개입하는 순간, 그 소통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현실과 판타지의 대결에서 현실 원칙의 승리, 달리 말해 판타지는 우리가 꿈꾸고 지향해야 하는 이상적 세계일 수는 있으나, 결국 현실의 압력에 의해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와 달리 <웰컴 투 동막골>은 결코 판타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판타지의 두 가지 가능성

동막골 주민들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군인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눈다.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지만, 그들의 대치는 끝나지 않는다. 이때 상황을 종결짓기 위한 판타지가 등장한다. 우연히 수류탄이 곳간에 날아들고, 그 곳에 쌓여 있던 옥수수가 터지면 하늘에서 팝콘이 꽃가루 흩날리듯 동막골을 수놓는다.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의 알레고리로 보이던 남북 군인의 대립은 판타지의 등장과 함께 이후 급속도로 반전된다. 대립된 관계를 합일 가능한 것으로 진전시키는 판타지의 기능은 맷돼지 사냥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등장하는데, 이처럼 <웰컴 투 동막골>의 판타지는 리얼리즘으로는 쉽게 가로지를 수 없는 어떤 단절된 경계를 무화시키는 주술적 효과를 낳는다. 때문에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현실과 판타지가 대결하는 부분이다. 동막골에 스미스를 구하기 위한 군인들이 등장하면서 대립된 남북의 군인이라는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라는 현실세계의 명령이 발동한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비교하자면 북한 장교에게 그들의 놀이가 발각되는 순간과 대응하는 이 장면에서, 동막골 주민과 남북 군인들은 현실의 압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상적 합일이라는 자신들의 판타지를 끝까지 사수한다.

<웰컴 투 동막골>의 판타지는 관객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위해 고통스러운 역사를 감내할 만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탈역사화의 가능성이 있다. 이는 역사에 접근하는 많은 영화들이 지니는 근본적인 딜레마다. 하지만 판타지가 역사에 대한 ‘부정적 가정’(negative subjunctivity)을 통해 기존의 역사를 거꾸로 비추는 거울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면, 이는 판타지가 역사의 ‘어딘가 다른 곳’에 눈길을 둠으로써 가혹했던 역사를 반추하도록 하는 계기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 동막골의 입구에 늘어선 후덕하게 생긴 얼굴 등(燈)은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짓는 경계이자, 역사적 진실과 역사적 가정을 나누는 징표이기도 하다. 즉 카메라와 함께 동막골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가 갖지 못했던 또 다른 역사를 봄으로써 기존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재인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에 대한 판타지가 ‘탈역사화’와 ‘역사에 대한 재인식’ 모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는 그것이 영화 속의 어떤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역사에 대한 극단적인 두 가지 가능성을 극점으로 삼는 스펙트럼의 어딘가에 위치한 <웰컴 투 동막골>은 영화의 초·중반부에는 루이스 캐롤식의 무의미(nonsense)한 유머와 영화의 후반부에는 휴머니즘이라는 숭고한 가치와 관련을 맺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탐색한다.

<웰컴 투 동막골>이 취하는 유머의 전략은 의미가 고정되기 이전으로 회귀함으로써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웃음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전쟁이 났다는 말에 쳐들어온 놈들이 왜놈인지 되놈인지를 묻는 동막골 주민의 반응은 무의미한 유머의 모범답안이다. 의미는 ‘이미/미리’ 정해진 그 무엇이 아니다. 의미는 무의미한 상태에서 일정한 방향이 부여될 때 하나의 의미로 고착된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무의미는 단순히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의미를 확정할 만한 임자가 없다는 것이며, 때문에 모든 임자에게 열린 빈자리는 의미로 충만하다. 이 충만한 의미가 고정된 의미의 목을 비틀 때 ‘무의미한 유머’가 발생한다.

우리의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에는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루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체제 이데올로기로 고정시킨 그릇된 고정관념이 작동한다. <웰컴 투 동막골>의 무의미한 유머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 달리 말해 한국전쟁이라고 입력하면 자동적으로 고정된 답을 출력하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를 비틀어댄다.원작자인 장진의 탁월함인 이러한 유머는 <간첩 리철진>에서도 드러나는데, 체제 전복이라는 거창한 이유가 아닌 허기진 인민의 배를 채우기 위해 슈퍼 돼지를 훔치려는 어설픈 간첩의 모습은 한국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찔러대는 짜릿한 쾌감이 있었다. 마치 앨리스가 토끼굴에 굴러떨어지고 거울을 통과함으로써 의미 작용이 멈춰진 무의미의 영역에 들어서듯이, 전쟁과 무관하기에 그에 대한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작동하지 않는 무의미한 세계인 동막골(남북 군인에게 “니네들 친구가”라고 묻는 여일(강혜정)은 이러한 무의미를 온몸으로 구현한다)에서는 남북 대치가 그리 심각하지 않은 개인간의 다툼처럼 여겨질 뿐이고, 총은 막대기로 변하며,수류탄은 팝콘을 튀겨댄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리수화(정재영)를 휴머니스트로 제시함으로써 고정관념의 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처럼, <웰컴 투 동막골>의 무의미한 유머는 한국전쟁에 대한 통념과 한국사회의 지병인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신경통을 들춰냄과 동시에 자칫하면 비역사적 지대로 횡하니 날아가기 쉬운 판타지를 역사적 맥락에 붙들어맨다.

휴머니즘이라는 만병 통치약

하지만 근본적으로 <웰컴 투 동막골>은 자신이 소재로 채택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사건과는 어울리지 않은 순진무구한 시선을 지닌다. 전쟁이라는 살벌한 현실과 격리된 채로 무릉도원 같은 공간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동막골 주민들의 모습은, 근대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더러운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한국전쟁을 대하는 <웰컴 투 동막골>의 태도와 유사하다. 물론 이러한 순진한 시선은 역사적 사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동막골 주민들이 마을에 들어온 이방인들이 대립하는 이유에 대해 그리 궁금해하지 않듯이, <웰컴 투 동막골>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자막’으로 수용할 뿐, 이에 대해 ‘왜’라는 질문은 생략한다. 다리 폭파와 관련된 한국 역사의 치부는 표현철(신하균) 개인의 트라우마로 축소되고, 여일의 죽음 역시 광기어린 군인의 개인적 만행일 뿐이며,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결여한 이승권 정권의 뻔뻔함과 미군의 인종차별적 정책을 무시할 수 없는 민간인 학살 역시 그저 오해에 기반한 것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웰컴 투 동막골>의 순진함을 감안할 때, ‘왜’라는 질문을 통해 역사를 구조적으로 분석하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이고 보면, 이 영화의 탈역사화의 가능성은 ‘동막골이라는 판타지 월드’의 성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영화는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극에 활기를 주던 무의미한 유머 대신에, 노동과 축제의 기쁨이 넘치고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는 이상적 세계로서의 동막골을 보여주는데 치중한다. 마치 그것이 가혹했던 역사가 잃어버린 대안적 세계인 것처럼.

<웰컴 투 동막골>의 판타지가 자신을 바라볼 것으로 상정하는 응시의 지점은 역사의 시선이 아닌 ‘감당할 만큼의 역사적 아픔’만으로 휴머니즘적 감동을 즐기려는 관객의 시선이다. 전쟁 영화는 역사의 아픔을 상품화하는 부채 의식을 벗어나기 위해 휴머니즘의 힘을 빌리곤 한다. 가장 비인간적인 살육 행위에 대해 휴머니즘은 얼마나 좋은 대안인가. 하지만 역사적 뿌리를 상실한 휴머니즘이란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약속하면서도 결국에는 아무 병도 치유하지 못하는, 달리 말해 약장사의 혀끝에서만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과 다르지 않다. 영화는 노동과 축제가 기쁨이 되는 유토피아의 이미지와 이를 떠받치는 휴머니즘을 통해 판타지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한국전쟁이라는 ‘구체적 역사’는 증발해버린다. 판타지가 현실이 자의적이고 전환 가능한 것이었음을 제시할 수 있다 해도, 이는 현실의 시공간적 좌표를 벗어난 유토피아적 세계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없는 장소’이며, 이는 갑작스러운 연합군의 출현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의 엔딩에서 ‘관객의 영화적 기억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후일담으로 제시되는 여일과 남북 군인의 이미지 같은 것이다.

아픔만큼 순수해지고 싶은 것이 이 영화의 진심이겠지만, 그것이 역사의 너무 깊은 상처를 ‘즐길 만한 고통’으로 변형함으로써 얻은 대가는 아니었을까. 그것이 영화와 함께 웃고 울면서도, 그 감정을 ‘웰컴’하며 선뜻 반기지 못하는 이유일 게다. 이제는 <웰컴 투 동막골>처럼 잊혀졌던 역사를 한참 돌아 접근하거나 그 지긋지긋한 레드 콤플렉스를 완화시킨 것에 만족해야 하는 작품뿐만 아니라, 이를 잉태한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영화도 보고 싶다. 예를 들자면, <송환>의 극영화 버전 같은.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