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는 화면 때깔의 비약적 상승에 힘입은 바 크다. 투자 규모의 확대와 함께 시각 연출의 실험과 최신 기법의 도입이 발빠르게 이뤄지면서 시나리오의 발전을 선도했다. 최근 10여년 사이에 스타일이 빼어나기로 소문난 한국 영화 명장면 7개를 꼽아봤다.
비지스의 명곡 ‘홀리데이’와 함께 관객들의 뇌리에 박힌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40계단 살인 장면’은 ‘이명세 스타일’의 완성 혹은 정점으로 평가받아왔다. 샛노랗게 빛나는 은행잎이 뒹구는 오후, 차 안에 창문을 반쯤 내리는 한 남자가 있다. 은행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홀리데이’ 선율이 흐르고, 계단 위에 있던 유치원생 여자 아이가 하늘을 올려다 보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정지 화면과 빛의 효과를 통해 감각적으로 변화하는 날씨, 갑작스런 비를 보며 멍해진 표적 인물에게 다가가는 느린 동작의 살인범. 그리고 반으로 갈라진 우산과 손바닥을 긋는 칼, 이마에 번지는 피를 통해 표현되는 살인장면은 비장하면서도 우아하다. 옵티컬 효과, 컴퓨터 그래픽 등 다양한 시각 효과와 노란색, 붉은색 등 강렬한 색체들이 대비되는 이 장면은 살인의 순간과 인생의 서정을 병치시켜 그 충격을 극대화했다.
이명세 감독 이후 등장해 이미 거장 반열에 오른 스타일리스트,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의 ‘장도리신’은 자칫 지루하게 여겨질 롱테이크의 맛을 일반 관객에게 한껏 안겨줬다. 최민식의 머리 위를 수직으로 올라서는 50㎜ 망원렌즈 카메라. 곧이어 그가 좁은 복도를 가득 메운 어깨들과 일당백 결투를 벌인다. 24㎜ 렌즈 롱테이크로 담아낸 3분 가량의 이 장면은 강한 콘트라스트와 낮은 채도를 사용해 최민식의 고달픈 결투를 더없이 쓸쓸하고 고독하게 표현했다. 또 그가 적들을 물리치고 주차장으로 나올 때 들어오는 그 강렬한 한줄기 빛도 긴 여운으로 남았다.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2005)에는 정치적 논란과 더불어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부감숏(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숏)이 등장한다. 궁정동 연회장 곳곳에 흩어진 주검들을 천정 위에서 내려찍은 이 장면은 그 처참하고 은밀한 공간을 차갑고 감춤없는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자칫 볼거리로 남고 말았을 수 있는 이 피칠갑의 공간에서 역사적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를 보지 않은 사람도 “마이 무따 아이가, 고마해라!”라는 장동건의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 보다 좀 더 스타일리쉬한 장면으로 꼽힌 것은 네명의 친구가 부산 일대를 내달리는 ‘달리기신’이다. 이 장면은 골목을 도배한 추억의 영화 포스터와 구형 승용차, 옛 여배우들의 광고 선전물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올드팬들의 향수와 젊은이들의 동경을 자극한다. 흥겹게 흘러나오는 로버트 팔머의 ‘배드 케이스 오브 러빙 유’와 함께 잘 다듬어진 뮤직비디오 같은 스타일을 보여줬다.
노장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에는 좀 다른 느낌으로 스타일이 살아 숨쉬는 장면이 있다. 이몽룡의 명을 받고 성춘향에게 프로포즈를 전하러 방자가 달려간다. 방자가 몸을 흐느적거리기도 하고 나무에 앉은 새들에게 돌도 던져보는, 여유와 여백이 살아있는 그의 동선은 판소리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한국적 정취의 미학을 살려낸다.
1990년대 후반 <여고괴담>(박기형 감독, 1998)에 등장했던 일명 ‘점프 컷’은 많은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복도에서 귀신이 다가오는 모습을 5m 간격으로 찍은 뒤 이어붙였다. 귀신은 천천히 오다가 갑자기 한 걸음에 죽 다가온다. ‘너무 낡은 기법’이라 할리우드에서는 쓰이지도 않던 이 단순한 기법이 뜻밖에 큰 호응을 받으며 한국에 공포영화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김성수 감독의 <비트>(1997)에서 정우성이 두 팔을 벌린 채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도 홍콩 누아르에 빠져 있던 젊은 세대들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젊음과 반항의 상징인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를 갈구하듯 양 팔을 벌린 정우성, 이 장면은 젊은이들의 불안과 분노, 자유로움과 반항을 가장 감각적으로 표현해낸 명장면으로 젊은이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촬영장비·기법 진일보
최근 한국 영화 촬영에 도입돼 그 스타일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 촬영 장비 및 기법을 소개한다.
■ 스파이더 캠<스파이더맨>에 등장해 유명해진 촬영장비로, 스파이더맨이 아찔하게 수직낙하하는 장면에 쓰였다. <매트릭스>의 총알 피하기 장면에 쓰인 ‘뷸렛 타임(Bullet Time)보다 빠르고 자연스런 속도는 물론 매트페인팅 합성기법의 부자연스러움도 커버한다. 한국에서는 현재 개봉 중인 장진 감독의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20층 높이에서 빠르게 아래로 떨어지며 용의자 검거 장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스파이더 캠 장면.
■ 스페이스 라이트 천으로 둘러싸인 드럼통 모양의 조명기로 전구가 6개씩 박혀 있다. 대규모 실내 세트에서 요긴하게 활용 되는 기기로, 그 동안 한국영화에서 제대로 쓰인 적이 없었다. 빛과 어둠의 조절이 중요한 이명세 감독의 새 영화 <형사>에서 34대가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 모션 컨트롤 카메라와 광학 모션캡처 모션 컨트롤 카메라는 컴퓨터 카메라와 합성시킬 실사 장면 촬영에 사용 되는 특수카메라다. 또 광학 모션캡처는 사람의 동작을 추출해 컴퓨터 그래픽 캐릭터에 결합시키는 장비다. <반지의 제왕>의 ‘골룸’을 만들어 내는 데 쓰이기도 한 이 장비들은 <태극기 휘날리며>에 등장했던 피난장면, 군중씬 등에 활용돼 3차원의 가상 엑스트라를 스크린에 감쪽 같이 구현해 냈다.
■ 김블(gimbal) 선박이나 항공기 같은 큰 규모의 세트를 상하좌우 자유자재로 움직임일 수 있게 컨트롤하는 장치다. 현재 후반작업 중인 곽경택 감독의 영화 <태풍>에서 국내 최초로 선보이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해상 교전 장면을 사실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파도 재생기로 만들어낸 파도 위에 실물 크기의 갑판 세트를 띄워놓고 김블장치를 이용해 마구 흔들었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