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킬빌>의 우마서먼
2005-09-01
<킬빌>의 우마서먼

테니스 요정 마리아 샤라포바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지난해 가을에 일본에 출장 갔다가 아주 우연히 어느 호텔 로비에서 마주 친 것이다. 그는 그랬다. 9척 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 길게 쭉 뻗은 다리. 그러나 기골장대한 몸과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높은 곳에서 내려 보는 오밀조밀한 눈코입, 어색하게 마주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를 도도하게 무시하던 눈빛. 내가 일반적으로 알던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른 신체비례를 가진 그는 모든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오락실의 비디오 게임에 나오는 ‘사라’나 ‘니나’같은 여전사를 눈앞에서 조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비현실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매력을 느낀 건 단지 샤라포바가 예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여성들은 무섭다. 그러나 무섭기에 매력적이다. 그래서 중학생 시절부터 오락실과 무협지를 헤매고 다니면서 예쁘면서 강한 여성들을 탐닉해왔다. 그리고 그런 여전사의 리스트에는 <킬빌>의 브라이드, 우마 서먼이 수위를 차지한다.

내면의 따뜻함 감춘 냉혹한 킬러, 현실의 ‘브라이드’ 등과 소주 한 잔 먹고 싶다

브라이드의 매력. 쭉뻗은 다리로 어색하게 일본도를 들고 80명이건 100명이건 상관하지 않고 난도질을 해대는 그는 무섭다. 중국의 최고수에게 직접 사사받고, 일본 최고 명장의 칼을 든 그에게 어설프게 추근거리기라도 했다가는 목이 댕강 날아갈 판이다. 다소곳이 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다른 스크린 속 연인들과는 다르게 브라이드는 결의로 가득찬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보호본능이 아니라 보호받고 싶은 본능을 자극한다. 그와 함께 어두운 밤거리에서 불량배를 만난다면 너무 든든할 것 같다.

이소룡 추리닝을 입고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칼을 휘둘러대는 그, 벌벌 떠는 일본 날라리들에게 엄마처럼 잔소리까지 하는 그는 무척 여유로워 보인다. 그런데 그에게도 틈이 있다.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척하지만, 사실 그의 얼굴에는 어쩔 줄 몰라하는 혼란스러움이 짙게 배어난다. 별명이 예전에 검은 코브라였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복수를 하러 다니는 그는 금자씨보다 훨씬 헐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긴 몸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같은 표정. 주위에서 다들 냉혹한 킬러라고 하지만, 너무 혼란스러운 감정을 그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킬빌>에 나오는 여러 잔인한 여고수 중에서 우마 서먼은 가장 나약하다. 루씨 리우의 넘치는 카리스마나 대릴 한나의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잔인함에 비하면 우마 서먼은 ‘나도 잘 모르겠어’ 하는 표정을 짓고, 그렇게 혼란스러워 하면서 맨날 설득당하고, 방심하다가 선방을 빼앗기고는 한다.

제영재/문화방송 피디

브라이드에게 끌리는 점, 그리고 우마 서먼이 나의 연인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사실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에 브라이드처럼 강하지만, 여린 여성들을 많이 봐 왔다. 브라이드의 외모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지만, 브라이드 같은 혼란함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주위에서 많이 만나왔다. 그들은 강하지만, 혼란스럽다. 냉혹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따뜻하다. 그들에게 적대적이기만 한 사회와 조직과 회사와 남자들 속에서 그들은 강해졌지만, 그리고 그놈들이 그들을 그렇게 위악스럽게 만들었지만, 가슴 속의 따뜻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브라이드가 죽은 줄 알았던 딸을 만나고 눈물을 흘리듯, 비정한 그들은 사실 다정한 그들이 아닐런지. 어쨌든 육식동물같은 몸에 초식동물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현실의 브라이드들과 오늘 소주 한 잔을 먹고 싶다.

제영재/문화방송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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