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가이드]
할리우드가 상대성을 말할 때, <커리지 언더 파이어>
2000-01-04
글 : 홍성남 (평론가)

각 인물들의 증언에 따라 동일 사건에 대해 몇 가지 상이한 버전을 보여준다는 것이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1950)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점은 웬만한 영화팬들이라면 숙지하고 있는 사실일 게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커리지 언더 파이어>는 기본적으로 <라쇼몽>의 이런 이야기 구조를 ‘차용’한 영화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지레 겁부터 먹고서 이 할리우드영화를 대할 필요는 없다. 할리우드의 모토는 항상 관객을 괴롭히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 봉사한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예컨대 <라쇼몽>처럼 끝까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밝히지 않으면서 ‘당혹스럽게도’ 진리의 상대성 운운하는 것은 할리우드적 방식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진실에 대한 혼란이 있고 플래시백이 빈번히 나온다 해도, <커리지 언더 파이어>는 이해하기에 전혀 혼란이 없을 만큼 플롯이 가지런히 정지(整地)되어 있는 영화다.

<커리지 언더 파이어>가 파고들고자 하는 문제는 여성 공군 대위 캐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것. 걸프전에서 전사한 그녀는 여성으로는 최초로 백악관으로부터 최고 무공 훈장을 받기로 되어 있다(이 영화는 걸프전에 대한 최초의 할리우드영화인 동시에 전투하는 여군 영웅을 다룬 몇 안 되는 예에 속한다. 물론 전형적인 할리우드영화답게 이 두 가지 문제 가운데 어느 것도 ‘본격적’으로 다뤄지진 않는다). 하지만 캐런의 부대원들 가운데 누구는 그녀야말로 영웅이라고 하고, 또 다른 누구는 겁쟁이였다고 증언한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관객의 대행자는 설링 중령. 서훈(敍勳) 심사 임무를 맡은 그는 야간 전투 도중 실수로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인 기억으로 고통받는 인물이다. 집요하게 캐런에 대한 진실을 캐는 노력을 통해 설링은 자신의 끔찍한 트라우마도 치유한다.

무언가를(이를테면 용기와 진실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하는 고급 영화와 거대 예산의 블록버스터를 결합한 영화라며 미국의 많은 평자들은 <커리지 언더 파이어>에 호평을 보낸 바 있다. 그러나 종국에 이르러 성조기와 무공 훈장을 앞세우면서 두명의 영웅을 탄생케 하는, 이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는 사실 ‘할리우드 오락영화’로서도 범용함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커리지 언더 파이어>의 미덕을 찾으라면 ‘중용’의 자세로 이런저런 요소들을 한데 융합한 데 있을 것이다. 여기엔 적당한 스펙터클과 액션 시퀀스가 있고, 조직의 음모와 개인의 상처를 해결하는 영웅적 주인공이 있다. 그리고 난해하지 않은 교과서적인 ‘진실’이 담겨 있으며, 또한 플래시백을 비롯한 꽤 단조롭지만은 않은 영화적 장치도 있다. 요컨대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점잖은 영화의 한 표본이 <커리지 언더 파이어> 같은 영화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실제로 수상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커리지 언더 파이어>에는 지금보다 덜 알려져 있을 때의 맷 데이먼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그는 마약 중독자를 연기하기 위해 무려 18kg이나 감량하면서 병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영화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이같은 할리우드식 프로페셔널리즘은 빛이 나질 않는다(<성난 황소>의 로버트 드 니로의 예를 상기해보자). 이 예화만으로도 기계적인 프로페셔널리즘이 능사가 아님을 <커리지 언더 파이어>는 보여준다.

소시민적 영웅주의를 담아

감독 에드워드 즈윅

<커리지 인더 파이어>에서 보듯, 에드워드 즈윅(1952∼)의 영화들은 대개 소시민적 영웅주의를 담은 휴먼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주제뿐 아니라 테크닉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리 새롭지 않은 구식영화들이다. 그는 비록 눈에 띌 만한 걸작들을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태작을 내놓지도 않는 감독이다.

하버드에서 문학을, 그리고 AFI에서 영화를 공부한 즈윅은 한때 <뉴 리퍼블릭>과 <롤링 스톤>에서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스크린 세계로 발을 디디기 전에 그는 TV 분야에서 제법 촉망받는 연출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가족> <30대 이야기> <이른바 나의 인생이라는 것> <뉴스 속보> 등이 즈윅에게 상과 명성을 안겨준 TV 드라마들. 브라운관의 세계에서 그는 주로 현대인의 일상과 인간관계를 탐구했다.

즈윅이 만든 첫 번째 극장용 영화는 <어젯밤에 생긴 일>(1986). 데이비드 마멧의 희곡을 각색한 작품으로 로브 로와 데미 무어가 육체적 사랑뿐 아니라 정신적 교감에도 목말라하는 현대의 젊은이로 출연한다. 89년작 <영광의 깃발>(Glory)은 현재까지도 즈윅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 남북전쟁 당시 무의미하게 살육당한 흑인 병사들을 소재로 한 휴먼드라마로 덴젤 워싱턴을 스타의 지위에 올려준 영화이기도 하다. 강인한 웨이트리스와 순진한 가정주부가 일상을 벗어나려 한다는 여성 로드무비 <여자의 선택>(Leaving Normal, 92년), 브래드 피트의 매력에 기댄 에픽 <가을의 전설>(1994), 테러리즘을 다룬 스릴러 <비상 계엄>(1998) 등이 즈윅이 감독한 또다른 영화들. 그는 지난해 화제작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제작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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