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출소한 맥스(진 해크먼)와 5년간의 선원생활을 마친 프랜시스(알 파치노)가 캘리포니아의 시골길에서 만난다. 그리고 세차사업을 같이 하기로 의기투합한 둘은 덴버와 디트로이트를 거쳐 피츠버그로 향한다.
<알 파치노의 허수아비>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 중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첫 수상하면서 일군의 영화를 대표하게 된 작품이다. 그러니 두 사람의 행로를 서부에서 동부로의 단순한 이동으로 볼 수는 없다. 개척정신과 이상향이 부정되고 권위가 도전받던 때, <허수아비>는 먼 옛날 야만의 땅을 찾았던 자가 문명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족의 해체와 사회의 분열, 황폐한 산업을 목격한 그들은 자연스레 유사가족 혹은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그 동맹은 소년과 할머니의 묘한 관계(<해롤드와 모드>) 또는 한 남자의 씁쓸한 분투(<잃어버린 전주곡>)로 형상화될 때도 있지만, <허수아비>는 <이지 라이더>나 <미드나잇 카우보이> 같은 전형적인 영화의 길을 따른다. 또한 부권을 상실한 채 길 위에 선 남자들은 간혹 은밀하나마 동성애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허수아비>에서의 그것은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프랜시스가 맥스를 아내라고 소개하는 것과 프랜시스를 붙잡기 위해 맥스가 카페에서 스트립쇼를 벌이는 것에는 농담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그러나 결국 견고한 현실 앞에서 동맹은 와해되고, 관계는 부정되며,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 프랜시스는 ‘까마귀는 허수아비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비웃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 두 사람은 허수아비였던 게다. 발을 내딛을 곳이 없어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말이다. 하나, 우린 두 사람을 보며 웃지 못한다.
<허수아비>는 영화적 가치를 떠나 가슴을 에는 쓸쓸한 정서만으로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작품이다. 화물열차에서 맥스가 외치던 대사- ‘잘 자라, 망할 세상과 망할 인간들아’- 와 푸른 수염자국이 있던 시절의 진 해크먼과 알 파치노의 투명한 연기는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물 것 같다. 그런데 동시대의 <마지막 지령>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도적>이 <허수아비>와 정서를 공유한 건 그렇다 쳐도, 그것이 이후 <아이다호> <제리>까지 이어진 걸 보면 남자들은 여전히 길 위에서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허수아비> DVD가 뒤늦게 출시됐다. 짧은 제작 기록과 예고편 등 부록이 아쉽긴 해도 리마스터된 영상은 시리도록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