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정지우 감독의 단편영화 <생강>을 처음 보았을 때 든 느낌은 감탄사였다. 총각 감독이(난 정지우 감독이 총각인 줄 알았다) 하필 파마약을 뒤집어쓴 채 동전 몇푼에 악다구니하며 살아가는 아줌마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것도 신기했고, 그의 단편 데뷔작이자 30만원짜리 영화 <사로>의 섬뜩함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닫힌 문 하나로도 새장 속의 여자를 이야기하는 미장센을 짜는 솜씨하며, 갓 서른을 넘겼을까 말까한 이 독립영화 출신의 감독은 운동권 아내로 대표되는 여자들의 삶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인화라는 남자 작가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소설에서 월경 전의 여자를 그렇게 섬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읽었을 때와 같은 신기함이기도 했다.
생강의 신기한 맛 그 이후
며칠 전 정지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 <해피엔드>를 보았다. 처음 든 느낌은 의문부호였다. 도대체 싫으면 얼마든지 안 살아도 되는 세상에서 왜 아직도 좀더 나은 반쪽(The better half, 서양에서 자기 배우자를 일컫는 말) 대신 더 씁쓸한 반쪽을 부여잡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봐야 되냐 말이지? 외도와 치정이라는 구식의 테마와 자칫하면 매도와 난도를 동시에 당할 게 뻔한 전형성의 이야기를 데뷔작으로 택한 정지우 감독의 의중이 궁금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답은 먼 곳에서 들려왔다. 가정이란 곳 자체가 구식이기 때문에. 영화란 매체는 엘리베이터에서 벌이는 격렬한 섹스에는 환호하면서도 먹다 남은 닭고기를 담아두려고 냉장고 문 앞에서 나체로 서 있는 여자는 그리지 않는 법이다. <아이즈 와이드 셧>의 스탠리 큐브릭의 말.
일상의 속에는 욕망의 거미줄이 도사리고 있다. <해피엔드>는 빠져나가려 할수록 더욱더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욕망과 일상에 갇힌 세명의 남녀를 그려낸다. 최보라(전도연)와 김일범(주진모), 서민기(최민식)는 각기 다른 색깔의 욕망으로 반목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준다. 특히 최보라와 김일범의 관계는 불륜인 동시에 그 맹목성이 구원이 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가파르게 돌파한다. 그래서 이 세명의 해피엔드를 향한 욕망의 삼중주는 완벽한 불협화음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인간적으로 비친다. 주인공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해서도 적당한 간격과 거리감을 두려는 감독의 배려는 주인공들의 욕망에 대해 평가적이 되기보다 그 상대성과 부채의식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해피엔드>의 디테일은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고 카메라는 조심스럽다. 우유병에 끼어 있는 개미 하나로도 부부간의 허허로운 자리가 대번에 들어앉게 되고, 타들어가는 사진 한장에 과거를 좀먹는 일상의 시간이 재현된다. 둥근 원형의 로앵글로 찍힌 아파트의 미장센 자체는 하나의 거대한 판옵테티콘(간수가 모든 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둥근 원형 구조의 감옥)의 형상으로 우뚝 서 있다. 창문 밖에서 끈기있게 배우들을 쳐다보는 카메라는 때로 관객을 거기 문 밖에 서 있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호기심과 무관심이 동시에 섞인 시선. 그러한 면에서 <해피엔드>는 관객에게 감독의 입장을 강요하기보다 설득적인 태도를 지닌 영화이기도 하다.
지극히 영화적이고 통속적인 교묘함
그러나 감독은 이러한 시선을 일관되게 끌고 가기 전에 한바탕 격전을 치른다. 초반 5분간의 전도연과 주진모의 격렬한 정사신은 롱테이크를 썼든 핸드헬드를 썼든 일단은 관음증적인 끈적한 기운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한 채 전적인 서비스 정신을 발휘한다. 정사의 강도가 관계의 질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다 보여주는 것이 리얼리즘을 재현하는 것도 아닐진대. 게다가 단지 상업성에 대한 배려라고 보기에 이 정사신은 그 재현 과정과 공간적 배치가 너무나 상투적이다. 가정에 얽매인 여자가 외간 남자의 방에서 맛보는 일시적인 해방감과 허무한 쾌락의 ‘금지된 놀이’는 <자유부인> 이후 유구한 영화적 인센티브였고, 늘 마케팅의 핵심 표어가 돼왔다. 물론 그때마다 유명 여배우가 벗는다는 언론의 세례도 한몫 했음은 물론이다(이러한 캐치프레어가 <정사>에서 이미숙에게도 역시 동어반복됐다는 사실을 잊기에 <해피엔드>와 <정사> 사이의 시간간격은 너무 짧게 느껴진다). 절묘하게도 감독은 최보라와 김일범의 정사신 후에 새와 얼룩말이 뛰어노는 TV장면을 배치함으로써 그곳이 최보라의 유일한 해방구라는 것을 표지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부터 <해피엔드>는 표면으로 보이지 않는 일상을 채워가기보다 실제적이고 통속적인 불륜의 묘사를 통해, <미워도 다시 한번>이나 <자유부인>의 한계 내에서 한국형 멜로의 낮은 곳으로 임하게 된다. 스스로의 미학적 자의식에 난도질을 하고 맞을 매를 먼저 맞는 기묘한 전략을 구사한 후 비로소 <해피엔드>는 제정신을 가다듬고 본론에 돌입하는 것이다.
<해피엔드>는 독립영화의 풋풋한 정신이 상업영화와 만나는 여울목에 놓인 기묘한 소용돌이다. 분명 <해피엔드>의 일상은 우리 같은데 어떤 부분은 지극히 영화적이고 통속적인 교묘함을 발휘한다. 분명한 것은 <해피엔드>를 가부장 영화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지만, 최보라와 서민기의 공간과 역할을 역전시켰다고 해서 우리 삶에 대한 어떤 모사나 문제제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남편인 서민기가 부여받는 공간- 문방구, 고서점, 편의점 등은 훨씬 더 서민적이고 주변부적이며 켜켜이 쌓아진 책들이 그러하듯 곧 넘어질 것 같은 정서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서민기가 점유하는 거실은 기존 영화에서 보여준 가족 공유의 공간이거나 권력적인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연속극을 보는 서민기의 행동 반경이 감정적인 동선과 일치하는 억압된 공간이다. 최보라의 공간은 훨씬 더 근대적인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전통적인 부엌이 아닌 안방과 직장을 부여받은 여성. 아마도 멜로의 틀 내에서는 박철수의 <안개 기둥> 이후 처음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부부간의 역할 전도와 공간적 역전성의 밑바닥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 안방은 최보라가 오히려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공간이며 그전까지 한번도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는다(살해장면 이전까지 최보라는 오프 스크린 사운드만으로 안방에 있다는 것이 암시된다). 자신의 공간의 주인이 되어 나타나지 못한 채, 외간남성의 방에서 일어나는 성적 일탈의 주체로 형상화된 아줌마. 그래서 최보라의 밥상은 일상적이지만 최보라의 불륜은 영화적이다. 더 나아가 최보라의 살해 신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해피엔드>의 다음번 의문부호는 한 가지. <해피엔드>의 정사도 <해피엔드>의 불륜도 <해피엔드>의 살인도 영화적인데, 왜 <해피엔드>의 일상은 그토록 실제적이어야 하는가? 왜 연속극과 우유갑을 자르는 남자와 자동차 세차와 아이가 끼어들어야 하는가?
결국 실현된 것은 남자의 분노와 욕망
그 일상은 너무나 감독이 공을 들인 거라서 오히려 의심이 간다. 마치 서민기가 즐겨 시청하는 연속극처럼 일상성을 강조하는 것이라서. 심지어 그러한 일상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최보라의 이야기가 허구라는 것을 깜빡 잊을 수조차 있다. 그것은 마치 밖의 액자가 있음으로 해서 안의 그림의 주체성이 확인되는 액자로서의 일상의 느낌 같은 것이다. 판타지를 우리의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접착제로서의 일상. 최보라의 불륜은 연애소설을 읽는 서민기의 환상의 구현이다. 최보라의 죽음 역시 추리소설을 읽는 서민기의 환상의 실현이다. 홈홈 스위트 홈. <해피엔드>는 끝으로 갈수록 남성이 주도하는 100만볼트짜리 판타지의 전류를 슬금슬금 흘리게 된다. 결국 실현된 것은 최보라나 김일범이 아닌 서민기의 억압된 분노와 욕망이다. 이는 세 사람의 욕망의 무게를 공평하게 가름하려 했던 애초의 감독 의도에서 보자면 상당히 일관성에 흠집을 내는 것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를 보상하기라도 하려는 듯, 창 밖에 여자 주인공을 세워두고 근조등을 띄우거나, 최보라를 죽인 후 서민기가 흘린 눈물과 그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의 허전함과 불행감을 엔딩으로 덧붙인다. 그럼 한번 이쯤에서 감독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만약 최보라와 김일범이 작당을 하고 남편을 죽인 후 완전범죄를 저지르는 경우에도 <해피엔드>는 지금과 등가물이 될 수 있을까?
이후 최보라에 대한 김일범의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최보라의 슬픈 자화상이 그려진 엔딩이 있다고 해서 <해피엔드>가 지금처럼 관객의 저항감의 수위를 낮추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해피엔드>를 보는 것은 평론가로서는 해피하지만 여성 관객으로서는 언해피한 경험이었다. 분명 정지우 감독은 상당한 실력과 차분함을 가지고 있고, 다른 것은 다 버려도 스토리와 캐릭터를 견지하는 든든한 현명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해피엔드>는 실상 낭비되거나 허술한 신이 거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만들어진 영화이다. 상업성과 감독 본연의 자의식 사이의 괴리라는 이중의 날은 감독에게도 해결해야 할 숙제였겠지만 그가 <생강>을 만들지 않았다면 모를까. 정지우는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갇혀 있는 ‘여자’를 그렸던 감독이다. 비유하자면 이건 변영주 감독이 어느 날 <귀여운 여인>을 만들며 나타나는 것과 같은 느낌이고, <넘버.3>의 송강호식으로 말하자면 ‘배배배신이야 배신’. 그래서 <해피엔드>를 보면서 든 마지막 생각은 더이상 대한민국의 남성 감독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다. 오히려 <해피엔드>를 통해 확인한 것은 가정을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남성이 주도하는 치정극의 장으로 변모해가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하는 심정이었다. <해피엔드>의 절반의 실패는 정지우의 실패이라기보다 남성 감독의 한계에서 오는 인지상정으로 밀어놓고 싶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 너희가 진정 여자를 아는가? <해피엔드>의 해피를 빼고 드는 마지막 엔딩은 이렇게 대답없는 메아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사족/ 소심하고 강박적인 서민기가 어찌하여 그토록 잔혹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가? 그 인과성에 회의를 품는 글들을 보았다. 정신병리적인 측면에서 서민기의 행동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론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공개화된 분노보다는 억압된 분노가 훨씬 충동적이고 우발적인 행동화의 무서움을 가지고 있다. 강박적인 완벽주의자로서의 서민기의 행동은 오히려 자신의 분노를 직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취소함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서민기의 살인이 잔혹하다는 것은 충분하지만 그것 역시 다 보여주었어야 했나 하는 것은 오히려 필요조건에 속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