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각색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씨가 결국 완성했다. 그는 쫓기는 사람처럼 부지런히 대학노트에 시나리오를 썼다. 어느 날 예고없이 돌연 염곡동에 있던 내 집에 나타나 훌쩍 그 대학노트를 던져놓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곧 그가 수사기관을 피해 도망다닌다는 소식이 간접적으로 들려왔다. 그는 각색에 자기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영화를 위해 유리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송기원뿐만 아니라 그가 좋아해 같이 술자리를 자주 했던 시인 고은 선생도 수사기관에서 쫓는 모양이었다. 80년 봄이었다. 시국이 다시 어수선하고 정국이 뒤숭숭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시사 감각이 둔한 나는 그저 오랜만의 영화 연출 작업에 신이 들려 신경을 다른 곳에 쓸 여유가 없었다. 즉흥 연출만 일삼던 내가 처음으로 콘티를 만들고 연출 계획을 사전에 준비했다. 눈을 감고 시나리오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떠올리는 일을 자주 했다.
그러나 캐스팅에서 나는 또 서툴게 아마추어의 시행착오를 범했다. 제작사를 겨우 설득해 신인을 뽑기로 하고 신문에 광고도 냈다. 원작처럼 실제로 사시(斜視)의 청년을 배우로 뽑겠다는 의지였다. 최일남 소설 <우리들의 넝쿨>에 나오는 주인공 덕배는 사팔뜨기였고 나는 새삼스럽게 네오 리얼리즘의 신봉자였다. 전국에서 지망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대개는 영화 배우보다 출연 후에 눈을 정상으로 고쳐주겠다는 영화사의 제의에 더 관심이 많았다. 내가 고른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연기에 전혀 무지했던 이 경상도 출신의 청년을 내 집에 기숙시키며 대사 연습을 별도로 시켰다. 그러나 한달이 지나도록 전혀 발전의 기색이 없었다.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는 청년이었다. 별 수 없이 그 청년을 다시 고향으로 보내면서 인연이 그렇지 않아 눈을 수술하기로 했다. 안과 전문의 이철영씨가 아주 호의적인 비용으로 시술해 주었다. 그 청년은 수술을 마치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그뒤 소식이 무척 궁금하다. 캐스팅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뒤로도 나는 많은 신인을 만나 함께 영화를 만들었지만 주인공을 찾을 때마다 늘 고통이었다. 사팔뜨기 청년에게 온통 신경을 빼앗기고 있을 무렵 우연히 아역으로 유명했던 안성기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모습과 달라 낯설었고 그가 수줍게 인사를 건넸지만 네오 리얼리즘의 의욕으로 자물쇠가 굳게 잠겨져 있는 나의 감각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 굳은 자물통을 연 것은 조감독 배창호였다. 캐스팅에 끙끙대는 나를 옆에서 지켜보다 참지 못한 창호가 조심스레 안성기를 추천했다. 그제야 관심을 갖고 그를 제대로 보기 위해 불러냈다. 다시 안성기를 보는 순간 그의 손에 철제의 자장면 배달 용기가 들려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사팔뜨기는 아니지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제야 현실 타협의 캐스팅 안목이 트이기 시작했다. 이발사 춘식은 내 동생 이영호로, 여관종업원 길남은 요 얼마 전 아깝게 젊은 나이에 죽은 고 김성찬으로 정했다.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가슴 아픈 것은 작가 송기원이 수사기관에 붙잡혔다는 소식이었다. 그가 살았던 화성군 팔탄면 월문리의 아늑한 마을에서 안성기의 고향 장면을 찍었다. 송기원은 없었지만 그가 가깝게 지냈던 그 농촌마을의 청년들이 적극 나를 도와주었다. 광주에서 흉흉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쩐 일인지 사실 보도가 되지 않고 있어 무성하게 끔찍한 소문만 들려오고 있었다. 군인들이 광주를 쑥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수없는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고 했다. 무고한 어린 학생들의 머리가 군인들의 총개머리 판에 맞아 골이 쏟아져 나오고 여학생의 젖가슴이 총검으로 도려내어진다는 지옥 같은 소식이었다. 광주뿐만 아니라 전라도 땅엔 아무도 들어갈 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신문엔 군인들이 폭도들의 난동을 진압하고 있다는 작은 보도로 그쳤다. 영화가 완성됐지만 세상은 내가 영화를 처음 기획했던 때와 달라 미처 꽃도 펴지 못한 채 봄이 다시 겨울로 되돌아서고 있었다. 고은 선생과 송기원은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사범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영화검열이 다시 엄격해졌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장장 열 시간이 넘는 심각한 검토를 당하고 있었다. 당시의 영화 검열은 안기부, 보안사, 시경찰국, 문공부 등등에서 나온 검열관들이 기세가 다시 높아질 때였다. 단지 박 대통령의 시해 사건 이후 반짝했던 민주화의 여파 때문이었을까? 심의위원 중에 다행하게도 박완서 선생이 계셔 영화를 위해 완강하게 버티셨는데 한 장면도 잘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펴서 토의가 그렇게 길어졌다는 후문이다. 결국 <바람 불어 좋은 날>은 한 군데 잘리는 것으로 허가가 나왔다. 주인공들이 친구의 입대를 앞두고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 노래말 속에 “영자를 부를거나, 순자를 부를거나, 영자도 좋고, 순자도 좋다. 땡까댕! 땡까댕!” 속에서 순자라는 부분만 잘렸다. 새로 된 대통령 부인의 이름이 순자였다는 것을 그제야 처음으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