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팝콘&콜라] 싱글일땐 몰랐네 멜로의 ‘약’기운을
2005-09-08
글 : 전정윤 (한겨레 기자)
<너는 내 운명>

일주일쯤 된 것 같다. 리모컨 누르는 게 귀찮아 케이블 채널 광고방송을 20분이나 두고 볼 정도로 움직이는 게 싫고, 등짝이 침대에 딱 들러붙어 회사 대신 병원으로 직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출근시간을 지연시키기도 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순풍에 돛단 연애전선에 자꾸 제동을 걸게 되는 까닭 모를 슬픔이나 결핍감 같은 건데,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통해 자가진단을 해본 결과 내 증세는 ‘계절성 정동장애’다. 계절적인 흐름을 타는 우울증의 일종이라는데, 그 영문약자가 심금을 울린다. SAD(seasonal affective disorder)! 그래, 또 이렇게 슬픈 걸 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왔나보다.

매년 이맘때쯤 찾아오는 우울증과 더불어 ‘계절 알람’처럼 가을을 알려주는 게 하나 더 있다. 여름 한철 극장가를 풍미한 액션과 공포 영화의 자리를 순식간에 대체하는 멜로영화들이다. 이번주 나란히 개봉해 삼파전을 벌일 한국 영화 가운데 <외출>은 말할 것도 없고, <형사>와 <가문의 위기>도 액션과 코미디가 섞이기는 했지만 큰 축은 멜로다. 그리고 또 한편, 이제 막 언론시사회를 마치고 23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최루성 통속 멜로드라마 한편이 있었으니, 제목이 <너는 내 운명>(박진표 감독)이다.

<너는 내 운명> 이야기에 앞서 4년 전 이맘때 봤던 <봄날은 간다> 얘기부터 잠깐. 그해 가을, 나는 명목상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하는 예비 기자였지만, 실존은 졸업 뒤 반년 넘게 일자리를 못 구한 백수였다. 특히, 연애하자고 주변을 얼쩡거리는 남자가 없었고, 더군다나 어김없이 ‘SAD’를 앓고 있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아! ‘SAD’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의 심장을 할퀸, 상우(유지태)가 은수(이영애)에게 던진 그 한 마디. 변해버린, 그래서 끝나버린 그들의 사랑을 목도한 뒤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쓸쓸함을 즐겼고, “너만 사랑해, 죽도록 사랑해, 영원히 사랑해”라고 흥분하는 영화들을 보며 졸거나 비웃게 됐다. 그리고 “지고지순한 사랑은 없다”고 담담히 읊조리거나, “사랑은 변하는 거”라고 쿨하게 웃어넘기는 영화들에 마음을 내주었다.

그렇게 꼬박 4년을 보낸 뒤 지난 6일 <너는 내 운명>을 봤다. 드러내놓고 ‘통속멜로’를 표방한 이 영화는, 장가 못 간 농촌 총각이 동네 티켓다방 아가씨한테 “너만 사랑해” 하며 결혼하고, 소까지 팔아 아내와 그 기둥서방의 관계를 정리해주면서 “죽도록 사랑해” 하는 것도 모자라, 아내가 에이즈에 걸린 뒤에도 “영원히 사랑해” 하는 영화다. 그런데 뜻밖에 ‘사적으로’ 이 영화에 맘이 꽂혔다.

<봄날은 간다>와 <너는 내 운명> 사이의 간극이 적잖이 당황스럽던 차에 4년 전과 결정적으로 달라진 신상의 변화를 떠올렸다. 옆구리 콕콕 찔러주는 사람이 없는 싱글일 때야 ‘사랑도 별게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차라리 위로로 들렸다. 하지만 눈에 콩깍지 뒤집어쓴 현재진행형 연애가 한창인 이 마당에, 다만 ‘SAD’ 때문에 잠깐 우울한 이즈음에, ‘너는 내 운명’이라는 판타지 같은 속삭임이 오히려 더 약이 됐던 건 아닌지. 시사회가 끝난 뒤 병원에서 항우울제를 타 먹은 기분으로 극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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