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사건처럼 찾아온 걸작, 이만희 감독의 <휴일>
2005-09-14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기적처럼 발견된 이만희 감독의 1968년작 <휴일>, 그 폐쇄성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만희 감독

이만희가 1968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휴일>은 당시 검열관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상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영화에 관한 기록도 없었고 평도 없었다. 말하자면 <휴일>은 한국영화의 기억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영화였다. 이 영화의 필름이 남아 있다는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그 필름의 존재는 불과 몇주 전인 8월 초에 발견됐다. 몇몇 사람은 9월3일 영상자료원에서 그 영화를 만났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10월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다.

이만희의 전설적인 걸작 <만추>(1966)의 필름이 사라진 뒤 많은 사람들의 오랜 노력에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건 뼈아픈 일이다. 그의 다른 영화를 보면 볼수록 <만추>는 애타게 보고 싶어진다. 이만희의 최고작들이 쏟아졌던 1960년대 중반에 그가 가장 사랑한 인물들을 그린 영화라니, 그리고 당대의 평가대로 또 다른 걸작 <귀로>(1967)마저 뛰어넘었다면,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 불행하게도 <만추>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존재조차 몰랐던 <휴일>은 거짓말처럼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건 올해 한국영화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이만희는 1931년 10월6일에 태어났고, 1975년 4월13일에 죽었다. 1961년에 <주마등>으로 데뷔해 15년 동안 5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30주기인 올해, 그의 생일인 10월6일에 시작되는 부산영화제에서 이만희 회고전이 열린다. 이 숫자의 일치는 우연일 테지만, 나는 이 우연이 주술적 힘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그의 영화가 후대의 관객에게 비로소 기억되기 시작함으로써 그가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 극소수의 영화인과 영화학자의 관심으로만 지탱되던 그 기억을 이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를 바란다.

이만희의 영화를 보면 한국영화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나는 믿는다.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걸 보지 않은 채 한국영화를 말해온 내가 부끄럽다. 2000년대 들어 분단을 다룬 영화들이 나올 때마다 종종 등장하는, ‘60, 70년대 반공영화의 한계를 넘어’ 같은 표현은, 이만희를 만나고 나면 결코 쓸 수 없는 말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의 기억과 만나야 하며, <웰컴 투 동막골>은 <04:00-1950>(1972) 혹은 <싸릿골의 신화>(1967)의 기억과 만나야 한다. 그리고 <주먹이 운다>는 <휴일>의 기억과 만나야 한다. 나는 오늘의 한국 대중영화가 40년 전의 이만희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폐쇄공포증의 시인, 이만희

프랑수아 트뤼포는 니콜라스 레이를 ‘황혼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를 모방해 나는 이만희를 ‘밤의 시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혹은 더 적나라하게 ‘폐쇄공포증의 시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혹은, 사대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않는다면, ‘한국의 니콜라스 레이’라고 부르고 싶다. 두 사람 모두 시스템 안에서 작업했고 팔리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온갖 장르를 전전했지만, 모든 작품에 자기만의 영화적 인장을 새겼다. 그 인장은 황혼 혹은 밤으로 환유되는 어둠, 폭력, 불안, 고독 그리고 서정성의 인장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만희의 어둠이 더 깊고 폐쇄적이다.

이만희는 그 세계를 서사의 굴곡에 기대지 않고, 인물의 표정과 동선과 미장센과 시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영화적 리듬으로 창조했다. 그의 영화는 당대의 어떤 영화보다 순수영화 혹은 시네마틱한 경지에 다가갔다. 아마도 그것이 임권택이 동세대 중에서 김기영과 함께 이만희를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자기 세계를 지닌 한국 감독으로 지목한 이유일 것이다. 스타일이 앞서는 김기영의 영화는 강하고 치열하지만 이만희의 영화는 아무리 강한 장면도 늘 아름답다.

이만희의 주인공들은 갇혀 있다. <04:00-1950>의 참호이거나, <원점>의 산이거나, <귀로>의 중산층 가정이거나, <생명>의 무너진 갱도이거나, <물레방아>의 주술적 마을이거나, <마의 계단>의 음산한 병원이거나, <만추>의 돌아가야 할 감옥이거나, 그들이 내던져진 공간은 출구가 없는 가혹하고 폭력적인 공간이다. 그들은 새벽이 약속되지 않은 밤에 갇혀 있으며, 그를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하지만 대개 실패한다.

이만희는 그 폐쇄성의 사악함과 탈출의 명분을 설명하느라 서사를 낭비하지 않는다. 그들의 육체는 그 곳에 숙명처럼 던져졌고,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죄어오는 공간의 억압과 본능적으로 싸운다. 이만희의 영화는 폐쇄의 미장센이며 육체의 동학이다. 이것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 그의 전쟁영화에서 반공이 사소한 부속에 불과한 이유다. 포화 속의 참호와 무너진 갱도는 그의 영화에서 동질의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이만희는 근본적으로 모더니스트다. 한 여인의 외도를 소재로 삼은 <귀로>는 이만희 영화의 모더니스트적인 요소를 망라하면서도, 폐쇄의 미장센에 가부장제와 군사 파시즘의 흔적을 은밀히 새겨넣은 위대한 리얼리즘영화다. 검열관이 명민했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이 불온한 저항의 영화는, 이만희의 남은 작품 가운데 의심할 바 없는 최고작이다.

그의 영화에서 휴머니즘을 읽으려는 노력은 헛수고다. 이만희의 주인공들은 휴머니스트가 아니라 운명론자다. 예컨대 <군번 없는 용사>에서 인민군 장교 신성일은 반공주의자 아버지를 총살시킨 뒤 자책감 때문에 은밀히 국방군을 돕지만, 나중에 국방군 앞에선 “나는 내 아버지가 반동이라서 죽였다”고 말하고 입을 닫는다. 혹은 <검은 머리>에서 깡패두목 장동휘는 “동정하는 눈초리로 나를 보지 마라. 악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혹은 <쇠사슬을 끊어라>(1971)에서 세 도둑은 끝내 독립군에 합류하지 않고 도둑의 길을 따라 만주벌판을 달린다.

가장 이만희적인 영화, <휴일>

<휴일>

이만희의 다른 영화를 보지 않고 <휴일>부터 만났다면 당혹스럽거나 실망할 것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거나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징징거리는 음악이나 몇몇 신파적 장면에는 거부감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만희의 영화를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휴일>을 보고 흥분하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휴일>은 이만희의 최고작은 아니지만, 가장 이만희적인 영화 가운데 하나다. 유작이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일컬어져온 <삼포 가는 길>(1975)과 <휴일> 중에 택하라면 망설임 없이 <휴일>을 택하겠다(이만희는 <삼포 가는 길>을 편집하다가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개인적으로 <삼포 가는 길>은 이만희의 실패작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휴일>의 줄거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빈털터리 남자 허욱(신성일)이 돈을 훔쳐 임신한 애인 지연(전지연)을 병원에 데리고 가지만 수술 중에 여자는 죽고 남자는 혼자 남는다. 이야기는 일요일 아침에 시작해 밤에 끝난다. 72분 길이의 극히 단조로운 이 영화가 검열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마도 이 영화에 담긴 극단적인 무력감 때문일 것이다. 이 남녀는 서사적 배경이 전무한 곤경에 내던져져 있으며, 그것을 개선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게다가 주인공이 동정할 만한 인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허욱은 여인이 생사를 건 수술을 하고 있는 동안 술집에서 양주를 마시며 또 다른 여인을 유혹한다. 그는 어떤 수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인간이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듣는 것은 그의 인간적 목소리가 아니라 동굴에 갇힌 짐승의 신음 같은 것이다. 극단적인 환경과 하필 그 순간에 찾아온 불운한 사건들의 중첩으로 젊은 남녀의 비극을 물신화하는 당대의 청춘영화와 <휴일>은 그래서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자연스레 오시마 나기사의 <청춘잔혹 이야기>가 연상되지만, 정치적 차원(일본 구좌파의 정치적 파탄이란 서사적 배경)이 부분적으로 개입하는 <청춘잔혹 이야기>보다, 배경 서사가 전무한 <휴일>의 숏들이 훨씬 강렬하다.

예컨대 이런 장면. 허욱이 돈을 구하기 위해 지연을 모래바람 이는 황량한 공원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부감 숏에서, 허욱은 외투를 지연에게 전한다. 하지만 그는 외투를 지연의 손에 쥐어주지 않고 10m쯤 가다가 흙바닥에 내려놓는다. 지연은 다가와 그 외투를 주워들지만 입지 못한다. 이 아무것도 아닌 숏이 심금을 울린다. 이를 허욱의 다가올 외도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해석하는 건 이 숏의 강렬함과 무관하다. 모래 바람, 머뭇거림, 좁혀지지 않는 거리, 옷을 입지 않음의 연쇄는 그것만으로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아프게 전한다.

또 다른 장면. 지연을 만나러 가는 길에 사기쳐서 담배 한갑을 얻은 허욱이 성냥이 없어 인부들이 쬐고 있는 모닥불에 다가가는 숏은,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이다. 모닥불로 불을 붙인 그는, 담배 하나 얻읍시다, 라고 말하는 인부들에게 담배를 하나씩 나눠준다. 그 순간의 허욱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아름답다. 허욱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담배를 꼬나물 때마다 성냥이 없음을 알아차린다. 부도덕하게 획득된 담배와 성냥의 지속적인 부재, 그 결여와 불안이 담배와 불의 공유로 이 순간에 완벽하게 해소된다.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그 순간 허욱의 표정은 이 출구없는 폐쇄공간을 신음하며 오가던 이 음울한 영화의 유일한 휴식처다.

생에 폐쇄된 사람들, 그 운명적 고독

<휴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일요일을 견딜 수 없어하며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영화는 내일을 약속하지 않으며 일요일 밤에 끝나버린다. 우리는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으로 주어진 일요일로부터 아무도 벗어날 수 없음을 영화가 끝날 즈음에 알아차리게 된다. <휴일>의 폐쇄공간은 바로 휴일이다. 그 휴일은 일주일 중 하루가 아니라 생 자체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극장전>의 동수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상기시키는 허욱의 내레이션을 듣는다. “서울, 남산, 전차, 술집 주인 아저씨, 하숙집 아줌마, 일요일… 내가 사랑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제 곧 날이 밝겠지. 거리로 나갈까. 사람들을 만날까. 커피를 마실까. 머리부터 깎아야지. 머리부터 깎아야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인이 죽고 난 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머리를 깎아야겠다고 말한다. 그는 머리를 깎을 수 없고, 새벽을 맞을 수 없다. 그리고 서울은 그를, 그는 서울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만희와 동시대를 살았던 명민한 평론가 고 이영일은 인간 이만희에 대해 “그는 생활현실의 모든 불행과 고독함을 자신의 회피할 수 없는 생체험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내부에 폐쇄한다”고 썼다. 페쇄한 자는 내부에 담긴 것을 발설할 수 없다. 우리는 <휴일>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그리고 영화의 모든 숏들에서, 발설할 수 없는 것들이 서로 뒤엉키고 부딪혀 피흘리며 울려나오는 신음을 듣는다. <휴일>은 이만희의 또 다른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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