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 속의 나의 연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때> 멕 라이언
2005-09-15
멕 라이언(씨네21 자료사진)

나는 종종 ‘이영애가 누구야?’와 같이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곤 한다. 방금 <웰컴 투 동막골>을 보고 나오는 길이면서도 동행들과 대화하며 영화에 출연한 배우 이름을 말하려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여일’이라는 여주인공 이름은 떠오르는데 ‘강혜정’이라는 배우의 이름은 좀처럼 기억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한 동일한 배우의 얼굴마저 매번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흔히들 길눈이 지독히 어두운 사람을 ‘길치’라고 일컫는 것처럼 나는 ‘배우치’임에 틀림없다. 주변 사람들이 쏟아내는 핀잔에 대한 나의 방어는 ‘그래도 황신혜는 알아’라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변명이다. 그러면서 나는 ‘암, 배우라면 황신혜 정도는 돼야지. 왜 다들 그렇게 밋밋한 거야’라는 혼잣말로 자위를 하는 것이다.

영화에 텔레비전 드라마에 각종 광고까지 다중 출연하는 국내 배우들에 대한 사정이 그러하니 외국 배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거의 유일하게 이름이며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는 여배우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멕 라이언이다. 1989년에 개봉된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 당시는 나는 스물다섯이었고 한창 열애 중이었으니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영화관에 나와 나란히 앉은 이는 바라볼수록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새록새록 다가오던 나의 연인이었다. 해리와 샐리의 로맨스에 나오는 사소한 에피소드들과 미묘한 심리들이 우리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어서 영화를 보는 동안 무척 즐거웠다. 그러면서 나의 연인과 샐리와 그 역을 맡은 멕 라이언은 내 마음 속에 완전히 겹치는 존재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해리와 샐리의 해피 엔드와 달리 우리는 각자의 길로 갔고 어느덧 블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한때 연인이었다가 친구로 남은 그녀를 어쩌다 해후하는 일은 세월의 무게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멕 라이언이 우리보다 너댓 살 위라는 사실은 때때로 나에게 큰 위안이 되곤 한다. 만일 멕 라이언이 세월을 거슬러 여전히 샐리 역의 귀엽고 발랄한 젊음인 채로 남아 있다면 그 또한 견디기 끔직한 출렁임으로 내 마음의 연안을 침식할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멕 라이언을 <유브 갓 메일>에서 다시 만났다. 이 영화는 1998년에 개봉된 영화지만 최근 몇 년 간 나는 새 영화를 개봉관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한 탓에 7년이나 뒤인 지난봄에야 디브이디를 구해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신형건/<푸른책들> 대표, <동화읽는가족> 발행인

<유브 갓 메일>은 나의 직업적인 관심사와 맞물려 꼭 보고 싶어했던 영화다. 수도권 외곽 도시에 자리잡은 조그만 의원을 꾸려가던 치과의사에서 어린이책을 만드는 출판사 대표로 전직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나는 언젠가 틈을 내어 이 영화를 꼭 보리라 벼르고 있었다. 대형서점 ‘폭스’가 들어서면서 42년 간 뉴욕의 한 동네를 지켜온 조그만 어린이 전문서점 ‘길모퉁이’가 밀려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메일을 통해 펼쳐지는 두 서점 주인의 로맨스가 나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의 무게가 더해졌을 멕 라이언의 모습이 무척 보고 싶었다.

역시 멕 라이언은 나의 기대를 조금도 배반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없이 젊고 발랄한 ‘샐리’가 아니라 수수하고 소박하고 친근한 여인 ‘캐슬린’으로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세월의 침식을 적절히 견뎌낸 모습으로 그녀는 잠시 종종걸음 치는가 싶더니 또 그 걸음을 제어하려 열 손가락을 활짝 펴서 허공을 가볍고 단단하게 짚는 것이었다. 상대역인 톰 행크스가 하얀 데이지 한 다발을 바친 것처럼 이 가을에, 나도 그녀에게 보랏빛 국화 한 다발을 바치고 싶다.

신형건/<푸른책들> 대표, <동화읽는가족>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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