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용맹스런 감독, 자세를 낮춰라, <세기말>
1999-12-28
글 : 박평식 (영화평론가)
천박한 세태를 향한 분노 <세기말>, 의도로 끝나다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40%를 웃돌고 있다. 터졌다 하면 60, 70만명이 기본이고 ‘영상 펀드’라는 말이 귀에 익을 정도로 영화판이 후끈거린다. 지난 겨울 줄초상난 것 같던 충무로가 1년도 지나지 않아 흥청거리고 있으니 불안감마저 든다. 그래서 세기말인가. <세기말>을 선보일 송능한 감독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친다. “관객에게 외면당한다면 감독으로서 진퇴를 심각하게 고민할 것이다.” 치받을 듯 당당한 폼이며 뱃심이 <넘버.3>의 박상면을 닮았다. 이번엔 재떨이를 던지는 게 아니라 우두둑 깨물어 파편을 날린다. 천박한 세태를 향한 송능한의 분노와 증오가 무섭다.

닳고 닳은 이야기, 영화는 현실을 못 따른다

정자들이 꼼실거리는 오프닝이 예사롭지 않다. 4개의 에피소드는 <숏컷>이나 <펄프픽션>처럼 분절되면서 물밑으로 연결되는데, 한 단락의 주인공이 다음 단락에 단역으로 잠깐식 나온다. 그들은 서로 아는 듯 모르는 듯 스쳐가고 마주친다. 첫 단락은 입에 풀칠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글을 찍어내는 시나리오 노동자 두섭의 이야기다. 감독은 꿈과 현실의 틈에서 부대끼고 망가진 그의 입을 빌려 ‘문화양아치’, 특히 영화평론가를 꼬집는다. 평론가를 돌팔이 감별사나 밥벌이에 환장한 폭군으로 도마 위에 올리지만, 두섭이 평론가에게 쏘아대는 독설은 앙심이 깔린 개그로 들린다. 특정 지면의 글쟁이들을 겨냥하는 것 자체가 졸망스럽고 간지럽다. 그렇게 좁은 시야로 세기말의 변화가 제대로 그려질는지 모르겠다. 충무로 일부 감독들은 흥행 실패를 ‘수준이 너무 낮고’ ‘공부하지 않은’ 평론가 탓으로 돌리는가 하면, 흥행에 성공해도 평단의 ‘엄숙주의’를 걸고 넘어진다. 평론을 권력으로 써먹는 사람은 송능한의 일기장에나 나올 것이다. ‘모라토리엄’에 어울리는 장면은 두섭이 총알택시 사고현장을 목격하는 대목이다. 피범벅의 아수라장은 <광란의 사랑>의 교통사고 장면에 견줄 만큼 오싹하다.

한국영화가 현실을 따라잡기 힘들다는 말은 맞다. 아저씨 수십명을 상대한 15살짜리 소녀가 임신하고 병까지 얻었다는 기사가 오래 전에 나왔으니 두 번째 에피소드 ‘무도덕’은 뒷북치는 꼴일 수 있겠다. 달동네 여대생이 원조교제로 돈을 벌어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아버지와 고시생 오빠를 뒷바라지 한다는 설정은 낡아도 너무 낡았다. 게다가 아버지뻘 되는 천박한 졸부와 교제하는 여대생은 그의 아들과도 몸을 섞는다. 신파극 수준의 상투성과 작위성이 드러나는데도 이 단락이 한국사회의 풍경으로 읽히는 까닭은 구성이 정교하고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수표 한장이 돌고 도는 과정을 통해 여대생의 닳아지는 육신과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표현하는 수법은 탁월하다. 졸부 아들을 쫓아가 망치로 내려치는 요요장수의 안석환 연기는 관객 등줄기로 고압 전류를 흐르게 하고, 졸부 역의 이호재가 혼잣말로 오랫동안 주절거리는 장면은 먹은 게 되올라올 정도로 역겹고 징그럽다. 장면마다 천민성으로 곪아가는 지금 이곳에 대한 분노와 연민이 서려 있다.

희망찬 엔딩: 요양소로 간 열혈남아?

일본말 ‘무데뽀’를 한국말처럼 퍼뜨린 주인공답게 송능한은 또다시 입심을 과시한다. 후진국을 ‘돈 버는 놈은 버는 대로 잘살고, 못 버는 놈은 못 버는 대로 못 사는 곳’으로 규정짓기도 하고, ‘에로틱한 우정’이라는 말로 대낮의 침실을 달군다. 하지만 위트 있는 대사들은 세 번째 단락에 이르면 어줍잖은 교훈과 적개심 섞인 웅변으로 바뀐다. 교수 자리를 팔고 사는 현실에 분개하는 대학강사는 자유연애론자로 때로는 허무주의자를 사칭하며 불륜의 섹스를 즐긴다. 사회와 역사를 더럽힌 ‘아비들’을 비난하는 그 역시 아버지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모럴 헤저드’ 상태에 빠진 것이다. 대학강사가 줄창 쏟아내는 말들은 선거 유세장의 스피커 소음처럼 듣기 괴롭다. 술판을 뒤엎고 흥분하는 장면은 눈을 감고 싶을 지경이다. 70년대 말 이동철 소설에 번진 ‘먹물’이 아직껏 흐르고 있다. 새끼, 먹물, 새끼들, 먹물. <세기말>이 현실을 비평하기보다 현실을 불평하는 영화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 건 바로 그 장면 때문이다. 주차위반 스티커를 긁어내는 상우의 일그러진 표정이 인텔리 스노비즘에 대한 공격보다 훨씬 실감나게 다가온다.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인물들의 후일담은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토록 어둡고 우울하고 막막하고 질펀한 풍경에 난데없는 ‘희망가’라니, 당치도 않다. 몸 전체로 세상의 시궁창을 헤집던 열혈남아가 요양소로 숨어든 셈이겠다. 희망은 사람한테 있단다. 몸 전체로 세상의 시궁창을 헤집던 열혈남아가 요양소로 숨어든 셈이겠다. 희망은 사람한테 있단다. 그래서? 박노해의 ‘흰소리’에 질린 사람들에게는 자장가로 들릴 것 같은 에필로그다. 두번째 작품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송능한 감독의 의도는 의도로 끝난 듯하다. 황혼기의 구로사와 아키라도 “아직도 나는 영화를 모른다”고 고백했다. 용맹스런 송능한은 자세를 낮출 필요가 있다. 그의 칼날 같은 언어에 기대를 거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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