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에선 흔히 전국 관객 500만명을 넘는 영화는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1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영화에는 집단무의식을 자극하는 제의적 성격이 있다는 얘긴데 거꾸로 흥행영화를 통해 그 시대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씨는 <랄랄라 하우스>라는 책에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예에 관해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등골이 휘게 일했지만 IMF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쓸모없다며 회사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억울함이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해 죽을 고생을 했는데 무장공비로 몰려 죽은 실미도 부대원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평생을 자식 성공만 바라보며 살았는데 자식에게 “내가 언제 그래달랬냐”는 볼멘소리를 듣는 부모의 마음이 <태극기 휘날리며>에 감정이입하게 만든 힘이라고 말한다. 이들 영화 속에서 현대사는 그냥 드라마틱한 소재를 넘어 현실 대중의 한풀이 제물이 된다.
그렇다면 최근 관객 700만명을 넘긴 <웰컴 투 동막골>은 어떤 경우일까? 몇몇 평론가가 이 영화에 깃든 민족주의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 것은 일종의 실마리가 된다. <웰컴 투 동막골>은 그곳 주민과 불시착했지만 동막골에 동화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연히 대립되는 구도를 갖고 있다. 이것이 한민족 대 미군인지, 평화 대 전쟁인지는 모호하므로 단순히 민족주의라고 말하긴 어렵다. 이 영화에 대한 대중의 열광엔 민족주의보다 강하게 작용하는 무언가가 있는 걸로 보인다. <웰컴 투 동막골>의 전제는 우린 원래 모두 착했다는 얘기다. 선한 우리를 망친 것이 미군이든, 이데올로기든, 총칼이든 절대 우리 스스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건 당쟁과 지역감정과 이데올로기 다툼으로 물든 현실과 나를 연관짓지 말아달라는 호소처럼 들린다. 확실히 이 영화는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누군가 남의 탓으로 돌리는 기능을 한다.
<웰컴 투 동막골>의 흥행요인이 퇴행적 현실도피 욕구라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고 말하긴 석연치 않다. <웰컴 투 동막골>에는 분열과 반목으로 시끄러운 세상에서 탈출하려는 욕구와 더불어 정말 군인답게 죽고 싶다는 소망이 들어 있다. 극적 감동이 최고조로 달하는 대목에서 이 영화는 은연중에 동막골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진정한 군인정신을 보여준다. 나는 이 대목이 한동안 시끄러웠던 이중국적, 병역기피 논란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다들 지켜봐서 알겠지만 이 문제만큼은 전 국민이 결사항전 임전무퇴였다.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얌체짓을 하나 지켜봤다. 나라를 지키는 임무가 그만큼 성스러워서였을까. 아무도 그렇게 믿진 않을 것이다. 내 조국을 지킨다는 사명감을 가지라고 밤낮없이 떠들어대지만 그 말에 전율을 느끼며 이 한 목숨 바치리라 결심하는 친구는 연대병력을 뒤져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웰컴 투 동막골>의 군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겐 지켜야 할 절박한 것이 있다. 바로 지상의 낙원 동막골이다. <웰컴 투 동막골>에 대한 대중의 호응 속에는 동막골을 지키고 죽어간 군인들처럼 나도 목숨 걸고 지킬 만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웰컴 투 동막골>이 보여주는 시대정신은 실종된 군인정신이 아닐까. 주적을 지목할 수 없는 시대에, 군대가 돈없고 빽없어서 가는 곳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된 시대에,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 동막골처럼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시대에 군인정신은 뭘 믿고 버텨야 하는가. (아무리 군인정신이 제정신이 아닌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지만) 군인다운 사명감을 갖고 싶은데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명분도 없고 그럴 의욕도 안 나는 상황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웰컴 투 동막골>은 군인다운 죽음이라는 대리만족의 체험을 안겨준다. 평화를 주장하는 <웰컴 투 동막골>의 흥행요인엔 사라진 군인정신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