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교차가 부쩍 커졌다. 낮에는 반팔차림도 어색하지 않지만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갈바람은 칼바람 같다. 스산해진 바람결에 옷깃을 여미면 예의 연인들은 옆구리를 챙긴다. 팔짱끼고 오붓하게 영화보기에 지금만큼 딱 어울리는 계절도 없다. 시끌벅적했던 여름 성수기를 뒤로 하고 겨울방학 시즌이 오기 전까지, 극장가도 추석대목을 제외하곤 고만고만한 비수기로 접어든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잠깐 숨을 고른 사이,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가 주를 이루는 소품들이 이 기회를 틈타 상영작 리스트를 채운다. 수요와 공급이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조응하는 이때, 극장가는 연인들의 눈물과 웃음으로 넘쳐난다.
신파 멜로 <너는 내 운명>이 2주동안 주름잡던 극장가는 이번주에 민규동 감독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하 <내 생애>)로 흥행바통을 넘긴다. 40% 내외의 예매율로 거의 모든 예매 사이트에서 1위를 달리고 있어 박스오피스 정상 등극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공동연출로 인상적인 장편 데뷔전을 치뤘던 민규동 감독은 이번엔 7커플, 14명의 사랑이야기로 좌판을 벌인다. <내 생애>는 외관상 <러브 액츄얼리>와 흡사하지만, 윤종신의 ‘환생’이 흐르는 예고편처럼 마냥 예쁜 러브스토리만 보여주진 않는다. 개별 커플들을 소개하는 전반부를 지나 이야기가 발전하는 중반부를 통과하면 ‘내 생애 가장 지옥같은 일주일’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극한 상황으로 인물들을 몰고간다. 해피엔딩을 감지하고 있는 관객들이 보기에 드라마의 호흡이 다소 불균질하게 느껴질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여러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에 빠져들다 보면 그런 ‘느낌’이 끼어들 여지도 크지 않다. 특히 황정민, 김수로, 임창정 등은 기존의 연기폭을 좀더 확장한 일면들을 보여준다. 여기에 각기 다른 인물과 인물이 우연처럼 필연처럼 교묘히 중첩되면, 개별 에피소드들이 하모니를 이뤄 앙상블 드라마의 묘미를 전해준다. 인물을 풀어내는 민규동 감독의 독특한 시선이 전작보다 무뎌진 점은 아쉽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동감할만한 웰메이드 드라마라는데는 이견이 별로 없을듯 하다.
할리우드발 로맨틱 코미디인 <날 미치게 하는 남자>도 연인들의 볼거리다. 보스턴의 유명 비즈니스 컨설턴트인 린지(드류 배리모어)는 일에서만큼은 완벽하지만 변변한 애인하나 없다. 여기에 수입은 초라하지만 사람은 흠잡을데 없는 매력만점의 고등학교 수학교사 벤(지미 팰론)이 나타난다. 드디어 천생연분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린지는 겨울에는 한없이 다정하지만 야구시즌이 시작하는 여름만 되면 보스턴 레드삭스에 미쳐서 자신도 내팽개치는 이 남자의 실상을 파악하고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화장실 유머가 장기인 패럴리 형제가 화장실 밖에서도 ‘실력’을 입증하는 깔끔한 로맨틱 코미디다.
SF소설가로 더 유명한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의 범죄소설 ‘리플리’ 시리즈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리플리스 게임>도 이번주에 개봉한다. 선과 악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존 말코비치의 카리스마가 빛을 발하는 영화로 스릴러 팬들이라면 체크 리스트다. 하지만 신작 중 <내 생애>를 제외하곤 사전 예매율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없어 주말 극장가는 <내 생애>와 <너는 내 운명> 양강 구도로 재편될 조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