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멜로영화에 대한 안티테제’란 글을 <씨네21>에 게재한 뒤 어언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개개인의 영화나 개별적인 감독이 아니라 어떻게 멜로 장르라는 거대한 뭉뚱그림을 통째로 비판할 담력이 있었을까 신기하지만, 그간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한번 멜로 장르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뒤에도 나는 숱한 멜로영화를 보았고, 충무로 역시 많은 멜로영화들을 만들어왔다. 그런 가운데 2005년 들어 개봉한 몇몇의 멜로물들은 98년에 이어 다시 한번 한국형 멜로 장르를 좀더 세밀히 관망하고 싶다는 무의식에서만 가두어왔던 열정의 불을 점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너는 내 운명>이 장착한 통속 멜로의 감정적인 강렬함과 사회성이 주는 흥미로움이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그 대극에 서 있는 허진호 감독의 <외출>과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를 보며 느낀 작가주의 멜로의 가능성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글은 허진호 감독이 <봄날은 간다>를, 김용균 감독이 <와니와 준하>를 만들었던 2001년에 이미 나와야 했을 그런 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멜로라는 장르에 대한 연구의 합의조차 부족한 지금, 끊임없이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멜로 장르에 대한 비평계의 화답은 언제나 너무 늦은 것은 아니라고 자위하고 싶다.
멜로 장르 안의 장르에 대한 고찰
네이버에서 멜로라는 용어를 검색해보자. <사랑니>에 대해 진심멜로, 통속멜로, 쿨멜로, 판타지멜로, 순정멜로라는 수식어들이 중구난방이고, <너는 내 운명> 역시 최루성멜로, 신파멜로, 통속멜로라는 용어 구분이 모호하다. 무엇으로 멜로라는 방대한 장르의 하위 영역들을 구분할 것인가? 예를 들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처럼 멜로와 코미디 장르에 걸쳐 있는 영화들은 어느 쪽으로 일렬 종대해야 하는가? 사실 멜로라는 큰 우산 아래 <외출>과 <너는 내 운명>을 한 뿌리로 엮으려 들어도 두 영화는 배다른 형제처럼 멜로라는 장르를 구성하는 캐릭터와 전략, 그 영화 형식의 면면에 있어서 오히려 모호함과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럴 때 멜로라는 용어는 그것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슬픔의 속성을 지칭하는 명목 변인의 기능 외에 어떤 기능을 한단 말인가?
예를 들면 <사랑니>가 아무리 진심멜로이고 통속멜로(감독 본인은 그렇게 주장하지만)라 할지라도 <너는 내 운명>의 통속성이나 진심을 추구하는 멜로적 화법이 <사랑니>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순정멜로라 칭하는 <사랑니>의 순정성이 <너는 내 운명>의 순정성보다 앞선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멜로라는 장르의 기원 자체가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어떤 ‘정서’를 지칭한다는 점을 상징한다면, 또한 언론에서 지칭하는 멜로 장르 중 가장 빈번한 용어들을 추려내어 골라본다면, 개인적으로 필자는 멜로의 하위 장르를 크게 ‘감성멜로’, ‘신파멜로’, ‘코믹멜로’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중 90년대 초반부터 크게 인기를 얻은 ‘코믹멜로’의 경우,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에서 다시 논의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일단 이번호의 멜로 장르에 대한 고찰은 잠정적으로 ‘감성멜로’ 대 ‘신파멜로’라는 구도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사랑은 안 변해” 신파멜로 <너는 내 운명>
<너는 내 운명>의 어떤 한 장면, 석중과 은하가 데이트할 때, 트럭을 몰고 야외극장에 가서 본 영화가 바로 당대의 감성멜로 <봄날은 간다>인 이 장면은 한국 멜로의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신파멜로와 감성멜로의 조우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박진표 감독은 <너는 내 운명>에서 당대의 감성멜로인 <봄날은 간다>를 영화 속 영화로 차용하면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대전제에 한치의 의심도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석중은 은하를 끝까지 사랑하고 책임지겠다고 그녀의 전남편에게 각서를 쓰고, 목소리를 빼앗기더라도 그녀만은 빼앗길 수 없다는 굳은 태도를 견지한다. <약속> <국화꽃향기> <너는 내 운명> <편지> <선물> 등의 9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형 신파멜로는 한결같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사랑, 첫눈에 반하는 운명 같은 사랑의 원형성을 감동의 핵으로 이야기 구조를 엮어나간다.
사랑의 운명성이란 모든 이들의 마음에 살아 숨쉬는 신화이자 가장 오래된 갈망 중의 하나여서 이들 영화에 대한 관객의 ‘자신의 첫사랑이 생각났다’거나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등등의 소감을 인터넷에 떠돌게 만든다. 이때 주인공들의 사랑을 막는 장애물은 <약속>에서처럼 여의사와 조폭이라는 계급 차여도 좋고, <너는 내 운명>의 AIDS나 <국화꽃향기>의 위암처럼 불치의 병이여도 좋다. 그러나 계급차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영원의 사랑학’을 믿게 하는 한국 신파멜로의 중핵은 사랑의 양태 혹은 사랑의 운명성을 오직 ‘이성애’ 혹은 ‘가족의 완성=사랑의 완성’이라는 등식으로 밀고 감으로써, 피할 수 없는 보수주의에 봉착하고야 만다. 숱한 신파멜로에 등장하는 둘만의 결혼식 혹은 소박한 결혼식 등등의 아이콘은 ‘불변한 사랑=가부장제’라는 불길한 제도권에 진입하는 징후로서 신파멜로의 여주인공들은 이 지점에서부터 분열증적으로 캐릭터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특징을 지닌다. <너는 내 운명>의 술집 여급 은하가 효심 깊은 며느리가 되는 지점도, 또한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국화꽃향기>의 여주인공 희재가 죽어도 아이는 포기하지 못하는 모성애의 화신이 되는 불균질한 캐릭터를 노출하는 지점도, 마찬가지로 비록 신파멜로는 아니지만 <엽기적인 그녀> 같은 코미디조차 갑자기 ‘<조신한 그녀>’가 되는 지점도 여기 결혼과 죽음의 진혼곡 사이이다.
가부장제에 포섭되면서 변화하는 여주인공의 여성성의 수용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여성 역할 구조를 이음매 없이 재현하고, 이러한 점은 ‘농촌총각의 국제혼’, ‘황색 저널리즘’ ‘AIDS 환자들의 인권’ 같은 당대의 사회적인 이슈들을 차용하고 80년대의 호스티스 멜로물 이후 보기 드물게 여급이라는 가장 하층 계급의 여성을 멜로의 자장 안으로 다시 불러들인 <너는 내 운명>의 경우, 두드러진 아이러니를 낳는다. 이 영화는 근자에 나온 신파멜로 중 가장 통속한 것들에 대한 연민 혹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윤리적인 태도를 노출하지만 결혼=사랑=이성애라는 등식의 내러티브 구조를 충실하게 답습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감성멜로 <봄날은 간다>
신파멜로의 여주인공이 기침 한번에도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는 사이 신기하게도 <와니와 준하>의 와니, <봄날은 간다>의 은수, <사랑니>의 인영 같은 감성멜로의 여주인공들은 죽음의 로또는커녕 위궤양 한번 앓는 적이 없다. 감성멜로의 진영에서 사랑이란 물론 다른 모든 감정들처럼 변화하는 것이다. 이들 무진장 튼튼한 여주인공들은 당대의 변화하는 사랑의 의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뿐 아니라, 가부장제의 대안으로써 다양한 연애의 주체로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그것은 때론 <정사>나 <와니와 준하>처럼 동생의 약혼자나 이복형제 같은 가족제도 안에서 ‘부부라는 단선’을 탈피하는 금기의 사랑, <봄날은 간다>처럼 연상연하 커플이나 총각이혼녀 커플 같은 당대의 사회학적 트렌드를 반영한 사랑이여도 좋다. 사랑의 금기를 허무는 것으로 사랑의 필연성을 전달하려는 이들 90년대 후반 이후 감성멜로의 전략은 관객에게 신파멜로처럼 사랑의 위대성에 대한 압도적인 정서적 체험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문득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기억의 편린으로서의 연애담 즉 ‘사랑의 현재성’에 살며시 젖게 만든다.
예를 들면 <봄날은 간다 >에서 은수를 사랑하는 상우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물어본다. 허진호는 ‘언어’가 아닌 ‘소리’를 택해 그 질문에 대답을 해준다. 이 영화에서는 사랑의 감정이 대나무 소리, 인경 소리, 냇물 소리를 함께 스크린에 스며든다. 이때 소리는 언어 이전의 상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입을 다물어도 침묵이 또 다른 입술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어떤 ‘과정’이 된다. 그러므로 상우가 녹음기사라는 설정은 상우가 단지 청각이라는 감각을 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채집하는 사람이란 뜻이며, 사랑이라는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어느덧 종착역에 도착하기 전 혈흔 속에 언어 이전의 상태로 사랑의 시간을 조각해버린다. 그리하여 상우와 헤어진 은수가 어느 날 상우에게 배운 대로 종이에 벤 손을 심장보다 손을 높게 두어 상처를 문득 아물게 할 때, 분명 잊혀졌다고 믿는 기억은 현재가 되어 다시 은수에게 파도처럼 되돌아온다. 상우의 할머니는 치매를 앓는데, 어쩌면 사랑이란 오랜 세월 뒤 자신이 간직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내는 치매 환자의 속성과 매우 유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봄날은 간다>는 90년대 후반에 등장한 많은 감성멜로 중 사랑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리하여 유독 이 영화의 평에는 나하고 하나도 안 닮은 이영애와 유지태가 하는 연애가 ‘자신의 이야기 같고’, ‘사랑의 일상성을 잘 그려냈’으며 ‘잔잔한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공감의 물결로 가득해진다.
여전히 남성 판타지인 감성멜로 <외출> <연애의 목적>
그러나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다시 이러한 감성멜로를 징후적으로 독해해보자. 90년대 후반 이후의 감성멜로들은 가부장제에 반하는 다양한 형태의 연애, 동성애 친구를 끌어들이거나 동거, 혼전 성경험 등을 다루는 등, 진일보하는 이데올로기적 발전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여전히 연애의 단맛이라는 당의정에 남성 판타지를 싸안는 모순된 행보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신파멜로의 남자주인공들이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남자 혹은 침입자=구원자의 등식에 충실하다면 감성멜로의 많은 남자주인공들은 ‘모든 걸 이해해 주는 남자’로서 여주인공이 느끼는 가부장제의 균열감과 공허한 구멍을 말끔히 지워준다. 그러한 면에서 <외출>은 허진호식 ‘착한+우는 남자’의 판타지에 배용준이라는 ‘신화적 이미지’를 포개면서 더욱더 붕뜬 연애담으로 가는 좌충수를 둔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손예진은 배용준에게 ‘어디로 가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는데 의당 ‘어디로 가고 싶어요?’라는 대답을 듣는다. 엔딩 크레딧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여자주인공의 의향을 배려해주는 자상한 남자주인공은 아내의 외도 앞에서도 정서적 억압을 감행하면서 그녀를 돌보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 점은 여자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외출>에서 대체 남자와 여자주인공 캐릭터에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결혼생활을 한번만 해본 사람이라면 단숨에 알아차릴 질투의 유치함과 생계의 초라함이 가진 파열성을 <외출>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아마도 <외출>이 실패했다면 그것은 허진호 감독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 한 가지, ‘가족’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장 잘 모르는 것 한 가지, ‘결혼과 불륜’을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재림 감독의 <연애의 목적>은 멜로의 자장 안에 성담론의 문제를 대담하게 섞어놓으며 돋보이는 유머감각을 발휘한다. 쫀쫀하다 못해 진드기처럼 사랑과 잠자리를 애걸하는 남자주인공 유림의 캐릭터는 너무나 생생하지만, 이름처럼 붉은색 옷만 입고 나오는 여선생 ‘홍’은 거의 성추행 수준으로 느물거리고 수학여행 가서 반강제적으로 살을 섞게 만드는 유림과 사랑에 빠져서 여성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결국 그들은 구질구질한 스캔들의 늪에서도 순정이란 마지막 희망을 건져올리는데, 아연실색하게도 이 지점에서 <연애의 목적>은 갑자기 순진해진다. 어찌되었든 단선적인 내러티브 구조와 눈물이라는 한 대야의 상업주의에 자신의 얼굴을 서서히 지울 수밖에 없는 신파멜로보다, 작가주의와 상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가 보이는 무대 혹은 진정 자신이 경험한 사랑의 시기에 대해 반추하고자 하는 많은 당대의 젊은 감독들이 기꺼이 감성멜로를 선택하는 경향은 이제 멜로영화의 대세로 보인다. 그러나 비교적 미학적으로도 모양새가 있는 감성멜로로 시작하여 다음 작품에 기대를 걸게 만들었던 많은 감독들이 90년대 중반 이후 ‘장르의 마술사’라는 허영의 불꽃에 휩싸여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연출하려들다 허무하게 스러져가고 있는 것 역시 작금의 멜로 장르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은 공포영화 <분홍신>으로,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은 블록버스터 <역도산>으로 원아웃 상태이고 <접속>으로 좋은 상업영화감독으로서의 자질을 보인 장윤현 감독은 <텔미썸싱>과 <썸>으로 거의 비평계의 파산 선고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이런 장르의 늪에서 빠져나온 드문 케이스가 바로 김대승 감독일 것이다).
이런 가운데 멜로 장르의 연구에 있어서 여전히 개인적으로 미련을 못 버리겠는 감독은 역시 허진호이고, 올해인 2005년의 수확은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은 작가주의 관점에서 한 사람은 여성주의 관점에서(사실 멜로 결산을 쓰겠다고 한 것도 속내는 이 두 감독의 영화 세계를 몇자 끼적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는 것을 숨길 마음은 없다). 아마도 원제처럼 <4월의 눈>이라 불렸으면 더욱 화사했을 <외출>의 균열은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에서 보여준 허진호식 마룻장 미장센과 두 주인공을 다정하고 나란하게 한 평면에서 잡는, 일종의 ‘도화지 미학’을 보여주었던 허진호의 연출이 ‘창의 미장센’으로 변화하는 실험과정에서 빚어진 불협화음으로 추측된다.
<봄날은 간다>에서 허진호의 신중한 카메라는 단 몇번, 즉 대나무밭에서의 크레인숏과 할머니의 죽음 이후 그녀의 신발을 쓰다듬는 듯한 부드러운 팬으로 두세번 움직일 뿐이다. 이때 카메라의 움직임은 오직 사랑할 때만 작게 미동하는 마음의 미세한 떨림으로서의 팬이요 크레인인 듯 보인다. 결과 <봄날은 간다>의 이별장면, 내내 한 화면에 나란이 잡혔던 평면의 유지태와 이영애가 처음으로 삼차원에서 움직일 때, 즉 셸로 포커스로 몇 발자국 가지 않았는데도 이영애가 프레임에서 곧바로 지워질 때, 폐부 깊숙이에서 떼어낼 수 없는 사람을 억지로 낙태시켰던 기억의 통증은 다시 몰려오는 새로운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외출>에서 허진호는 유독 창과 거울을 활용한 반사숏과 이전의 영화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부감숏, 비디오나 휴대폰의 화면, 심지어 부드러운 줌 같은 다양하고 새로운 영화 실험을 하기 시작한다. 특히 창 밖의 혹의 문 밖의 카메라는 문에 가려지거나 창에 반사된 주인공, 즉 공인되지 못한 사랑의 허무감을 쓸쓸이 되새김질하는 주인공을 잡으려 하는 허진호식의 감추어진 노력들이었다. 그러나 주인공들에게 밀착할 수록, 선에서 면으로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카메라를 움직일수록, 오히려 허진호 감독 특유의 미학- 평면성이 가진 소박한 정겨움과 휴머니즘 그리고 배경이 가지는 풍성한 의미의 살-을 자꾸만 도려내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고야 만다.
2005년의 최고의 수확인 감성멜로 <사랑니>
반면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는 맹장처럼 없애버려도 얼마든지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지만, 몸속 깊은 뿌리에서 나와 자꾸만 육신의 한쪽을 얼얼거리게 만드는 사랑의 속성을 반짝이는 감수성으로 은유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갖는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정교한 이야기 구조, 특히 플래시백인 줄 알았던 화면 전환이 사실은 현실에서 빚어지는 교차편집일 수도 있다는 독특한 얼개는 사랑의 어떤 속성, 세대를 거쳐도 자꾸 반복되고 그러면서도 깊숙한 사랑의 기억이 다시 다른 남자에게 투사되는 연애의 신비함을 살포시 잡아낸다. 마지막 순간, 만개한 벚꽃 아래서 수술자국을 보여주며 인영은 ‘나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될 거야’라는 바람을 고백한다. 정지우 감독은 젊은 날의 인영을 잡는 경우, 핸드헬드의 부드러운 역동성으로 떨림과 긴장감을 배가시키고 사랑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버렸지만 사랑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현재의 인영은 훨씬 안정된 미장센(내부 프레이밍)으로 대비시킨다. 특히 꽉 짜여진 인영의 클로즈업숏, 포옹의 순간이나 시간이 교차하면서 과거로 들어가는 초입에 등장하는 인영의 가득한 얼굴에는 사랑에 빠졌을 때 잠깐 나타나는 모든 여자들의 실존적인 아름다움이 얼핏얼핏 깃들여진다.
스크린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대본에 나와 있는 <사랑니>의 마지막은 이렇게 써 있다. ‘이제 여름이 올 것이다. 상처가 덧나기 쉬운 계절.’ 2005년 대한민국 멜로 역시 봄을 보내버렸지만, 무성한 잎과 열매를 맺으며 전진 중이다. 누가 멜로의 공식을 새로 쓸 것인가? 누가 멜로의 거장으로 <한국 장르 연구>의 책에 세 페이지 이상 등장할 것인가? 그 모든 예측과 실망과 또 다른 기대를 뒤로 하고, 만개한 한국형 멜로의 전성기를 보는 즐거움은 여전히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