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DVD로 보는 스타들의 무명시절
2005-10-26
글 : 김송호 (익스트림무비 스탭)
글 : 한청남

하는 일이 잘 안 되어 실의에 빠진 당신에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줄 지 모른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도사인 건 아니잖아.’ 맞다. 요즘 세상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만큼은 알몸에 빈손이라는 동등한 조건을 갖는다. 하지만 그 뒤의 삶을 결정짓는 것이 부단한 노력과 약간의 행운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가 아닐까. 마찬가지로 스크린 속의 스타들도 태어날 때부터 스타였던 것은 아니다. 더 좋은 연기를 하기 위해,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쏟은 노력과 열정이 약간의 행운과 함께 지금의 스타라는 위치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살펴 볼 스타들의 무명 시절 모습에는 한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어설퍼서 우스워 보인다는 것과 그렇게 이름 없던 때에도 관객들의 마음속에 작은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1년에도 엄청난 수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그 보다 몇 배는 많은 수의 배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이들이 남긴 인상은, 설사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무시할만한 것은 못된다. 그리고 그런 작은 눈도장이라도 찍히기 위해 그들이 걸어온 길은 역시 평탄하지 않았을 터이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스타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우리지만, 하루에 하나씩 아주 작은 부분에서만이라도 자신만의 흔적을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한 변화들이 쌓여 언젠가는 당신의 삶을 보다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꿈을 갖고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앨프리드 몰리나 <레이더스> (1981)

<프리다>에 이어 <스파이더맨 2>에서의 열연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앨프리드 몰리나. 기나긴 그의 무명시절 가운데에는 굵직굵직한 작품들이 제법 많은데,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첫 작품 <레이더스> 역시 그 중 하나다.

그의 첫 공식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존스 박사를 원주민들의 보물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는 안내원 사티포. 해리슨 포드가 황금빛 신상을 들어올리는 순간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돈세는 시늉을 하던 바로 그 캐릭터다. 결국 보물에 눈이 멀어 배신을 때린 뒤 그 업보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조역으로서 꽤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 탓에 DVD 메이킹 다큐 속 인터뷰에도 모습을 비춘다.

당시 영화 촬영 경험이 거의 없었던 그는 스필버그 감독과 카메라 앞에서 당황했다고 하는데, 하필이면 촬영 첫 날이 독거미에 둘러싸이는 장면이어서 무척 겁에 질렸다고 회고한다. 그럼에도 두각을 나타낸 것을 보면 배우로서의 자질을 타고나지 않았나 싶다. (파라마운트 / 국내 출시)

빌 팩스튼 <터미네이터> 1984

주로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자주 작업해 온 배우 겸 감독 빌 팩스튼. 할리우드에서는 특히 탄탄한 조연 전문(?)으로 더욱 돋보이는 배우인데, <에이리언 2>의 해병대원 허드슨 역(‘게임 오버야, 엉? 게임 오버!’ 라는 대사가 특히 유명하다)으로 전 세계의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전인 1980년대 초반에는 별 볼일 없는 역을 전전하는 무명 시절을 감내해야 했다.

지금은 제임스 카메론이 가장 신뢰하는 배우 가운데 한 명이지만, 그 역시 카메론 감독의 영화에서 지나가는 단역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1984년작 <터미네이터>가 바로 그 작품이다. 팩스튼은 도입부에서 막 1984년의 LA에 도착한 터미네이터가 조우하는 펑크족들 가운데 한 명으로 등장한다. 볼수록 얼빵하기 짝이 없는 벌어진 앞니와 분장, 머리 모양이 눈에 띄는데, 결국 너무나 얼빵하여 터미네이터에게 칼을 들이댄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러나 영화 밖 현실에서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팩스턴은 믿음직한 인상을 주는 멋진 중견 배우가 되어 있으니 역시 사람 일은 시간을 두고 진득하니 봐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법이다.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팩스턴은 대단히 성실하고 지적인 배우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좀 더 관심이 있다면 그의 인터뷰 기사들을 찾아 읽어 보라. (20세기 폭스 / 국내 출시)

론 펄먼 <장미의 이름> (1986)

움베르토 에코의 베스트셀러를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영화화한 <장미의 이름>. 007에서 박식한 수도승으로 변신한 숀 코너리와 앳된 미소년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타이틀롤을 맡고 있지만, 사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바로 곱사등이 살바토레다.

훗날 <헬보이>로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세상에 알리게 되는 론 펄먼이 맡았는데, 그는 최소한(?)의 분장과 괴연으로 잊을 수 없는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흉측한 외모와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괴물과도 같지만 주변의 위선적인 인물들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면모를 지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이단으로 몰리게 되고 모진 고문 끝에 화형을 당하면서 비이성적인 종교의 폐단을 온몸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론 펄먼은 장 자크 아노 감독과 전작 <불을 찾아서>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는데, 선사시대 인류와 딱 맞아떨어지는 그의 개성적인 외모와 연기력에 감탄한 감독이 살바토레 역으로 미리부터 점찍어뒀다는 후문이다. (워너브라더스 / 국내 출시)

헤이든 크리스텐슨 <매드니스> 1994

<스타 워즈> 프리퀄 3부작의 주인공으로서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소년에서 은하계를 ‘말아먹은’ 악의 화신 다스 베이더로 변모하는 아나킨 스카이워커. 전 세계의 소년들이 동경하는 이 역을 맡은 배우는 캐나다 출신의 헤이든 크리스텐슨으로, 아역부터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 온 성실하고 순한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2000년 루카스필름에서 <스타 워즈 에피소드 II>에 출연할 청년기의 아나킨 스카이워커 역으로 크리스텐슨이 발표했을 때 팬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배우의 과거를 찾느라 부산을 떨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존 카펜터 감독의 섬뜩한 공포영화 <매드니스>였다. 크리스텐슨은 이 영화에서 신문 배달 소년으로 잠깐 모습을 보이는데, 너무나 앳된 모습인데다가 주인공 샘 닐이 길을 물어보자 ‘저기요’ 라고 답한 뒤 자전거를 타고 금방 사라져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10년이 흐른 지금, <매드니스>의 한 장면인 이 사진에서 <스타 워즈> 등을 통해 전 세계의 관객들에게 알려진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이제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뉴 라인 홈 비디오 / 국내 미출시)

송강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

지금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의 반열에 오른 송강호지만, 그에게도 주목 받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그의 데뷔 시절 모습을 잠시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송강호는 3류 소설가인 주인공 효섭(김의성)의 동료 문인 동석 역을 맡았다.

동석은 효섭과 불륜 관계인 보경(이응경)과의 데이트 장면에 우연히 등장하여 효섭에게 문인들끼리의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효섭과 보경의 관계를 알아차린 그가 던지는 대사 ‘너희들 참 대~단하다!’가 인상적. 이후 효섭이 난동을 부리는 문인 모임 시퀀스에서도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개봉했던 때가 1996년. 이후 <초록물고기>를 거쳐 이듬해 <넘버 3>로 ‘뜨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년 남짓이다. 영화배우로서는 무명 기간이 대단히 짧다고 할 수 있겠지만, <돼지...>에서의 작은 역할조차 자연스럽고 당당해 보이는 것은 그가 연극 무대에서 착실히 내공을 쌓았기 때문일 것이다. (구판 : 마블 엔터테인먼트 / 신판 : 스펙트럼)

마에다 아키 <가메라 2: 레기온 습래> 1996 / <가메라 3: 이리스 각성> 1999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배틀 로얄>로 잘 알려진 일본의 아이돌 스타 마에다 아키는 9세 때인 1994년부터 예능 활동을 시작하여 올해로 11년째 경력을 쌓고 있다. 언니인 마에다 아이 역시 잘 알려진 배우로, 영화 데뷔는 마에다 아이가 주연을 맡았던 공포영화 <하나코>.

이후 아키의 초기 활동은 언니가 출연한 작품에 단역이나 엑스트라로 출연한 경우가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괴수영화 <가메라 2: 레기온 습래>와 <가메라 3: 이리스 각성>. <가메라 2>에서는 우주괴수 레기온에게 패한 가메라의 부활을 기원하는 어린이들 가운데 한 명으로 깜찍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역시 언니 아이가 주연한 속편 <가메라 3>에서는 아이가 연기한 소녀 아야나의 4년 전 모습으로 잠시 등장했다.

두 영화 사이에는 3년이라는 시차가 있는데, 그 사이에 미리 알고 보지 않는 이상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급성장(?)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편 <가메라 3>에는 또 한 명의 배우가 깜짝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다. 캠핑장에서 애인과 즐기다가 괴수 이리스에 의해 참변을 당하는 그녀. 드라마 <트릭>으로 뜨기 전의 나카마 유키에다. 엑스트라로 등장해 죽기에는 미모가 참으로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1년 뒤 <링0 버스데이>에서는 사다코의 젊은 시절을 연기,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역할을 맡는다. 사람 팔자는 참으로 모를 일이다. (어뮤즈 / 국내 미출시)

다케우치 유코 <링> (1998)

일본 호러의 대명사로 불리는 <링> 시리즈는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작품이기도 하다. 1편의 주연을 맡은 마츠시마 나나코(드라마 <야마토나데시코>)를 비롯해 나카타니 미키(<역도산>), 사에키 히나코(<에코에코 아자라크>), 나카마 유키에(드라마 <트릭>, <고쿠센>)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1편 첫 시작 부분에서 사다코의 첫 희생자가 되는 다케우치 유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후 드라마 <런치의 여왕>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그녀는 초난강과 함께 타이틀롤을 맡은 <환생>, 그리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로 이제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배우가 되었다. <링>을 처음 봤을 때는 선머슴 같은 여자애로만 보였는데 어느새 여성미 넘치는 매력적인 배우로 성장한 것이다.

위의 스틸은 다케우치 유코의 매력 포인트인 상큼한 미소가 돋보이는 장면. 정체불명의 비디오를 본 경험담을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그녀. 머지않아 벽장 속에서 비명횡사하게 될 운명을 맞이한다. (비트윈 / 국내 출시)

키이라 나이틀리 <스타 워즈 에피소드 1> (1999)

개인적으로 <스타 워즈 에피소드 1>을 볼 때 가장 당혹스러웠던 부분은 아미달라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이었다. 조지 루카스가 존경해마지 않는 구로사와 사부님의 <카게무샤>를 어설프게 오마주한 것 같아서 꽤나 찜찜했던 기억이 난다. 시종인 줄로만 알았던 내털리 포트먼이 여왕이었으니 그림자 무사 역을 한 배우는 찬밥 신세가 될 게 뻔했다. 그녀가 키이라 나이틀리였다는 걸 알고 새삼 놀란 것은 한참 뒤에 일이다.

게이샤처럼 얼굴에 온통 회색 분칠을 하고 나오니 누가 알려주지 않는 한 눈치 채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어쨌든 이후 <스타 워즈>의 후광은 접어두고 <슈팅 라이크 베컴> <러브 액츄얼리> 등 알짜 영화들에 도전한 건 잘한 선택이다.

그래도 예의상 <에피소드 2>에도 나와 줬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그건 희망사항에 그치고 말았다. 하기사 내털리 포트먼의 대타로도 모자라 대신 죽는 연기까지 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스타 워즈>에 나왔던 배우로만 기억되지 않는 그녀는 진정 성공한 셈이다. (20세기 폭스 / 국내 출시)

제니퍼 가너 <진주만> (2001)

<진주만>에 ‘여전사’ 제니퍼 가너가 출연했다고?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필자처럼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진주만>의 기나긴 러닝타임 가운데 그녀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주인공 케이트 베킨세일의 친구3 정도이기 때문(극 중 그녀의 이름은 산드라다).

게다가 잘빠진 몸매를 가리는 얌전한 의상에 안경까지 걸치고 있어서 더더욱 알아차리기 어렵다.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도망칠 때는 여지없는 간호사의 모습이지만 병원에서의 단호한 행동에서는 언뜻 <앨리어스>의 여전사로 보이기도 한다.

죽음을 통해 군인 남친에게 전의를 고취시켜주는 친구1만도 못한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지금은 케이트 베킨세일만큼 성공한 그녀다. 그리고 <진주만>은 제니퍼 가너에게 안경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좋은 예로 남을 것이다. (브에나비스타 / 국내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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