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인도의 위대한 휴머니스트를 만난다, 샤티야지트 레이 특별전
2005-11-09
글 : 홍성남 (평론가)
11월10일부터 시네마테크 부산서 열려
샤티야지트 레이 감독

<강>(1950)이란 영화를 만들러 장 르누아르가 콜카타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곳에 살던 샤티야지트 레이는 대단한 흥분을 느꼈고 결국은 그 존경하는 감독과 자주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르누아르가 거친 ‘모험’의 여정에 오른 파키스탄 출신 난민 가족을 만났다는 얘기를 레이에게 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레이는 그처럼 영화가 되기를 요구하는 이야기들로 온통 넘쳐나지만 실제로 그것들이 스크린으로 옮겨가지는 않는 곳이 인도라고 대꾸했다. “인도의 영화감독들은 주변의 현실보다는 할리우드영화의 번지르르한 인공성에서 영감을 얻기 때문이죠.”

현실에 뿌리를 내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레이의 의식을 떠난 적이 없는 중요한 과제였다. 이건 그가 아직 영화감독이 되기 전인 1948년에 쓴 ‘인도영화는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레이는 글을 이런 말로 마무리지었다. “영화의 제재는 삶 자체이다. 회화와 음악과 시에 그리도 많은 영감을 불어넣은 나라가 영화감독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눈과 귀를 열어두기만 하면 된다.” 레이라는 시네아스트는 이 문장들을 가슴에 품어두고 스스로 실행에 옮긴 사람이었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에서 영화의 모범을 발견한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단편들을 가식을 지운 정직한 시선으로 지켜보면서 마침내는 그로부터 나름의 영화적 흥분의 감각을 끌어내는 영화(<길의 노래>, 1955년)로 필모그래피의 첫장을 열었다. 이로써 기존의 인도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구축되기에 이르렀다.

<여신>(1960)이나 <차룰라타>(1964) 같은 레이의 어떤 영화들은 시선을 가정의 울타리 바깥으로 좀처럼 가져가지 않으면서도 가정 바깥에 존재하는 세상과의 접점을 상실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리얼리스트로서의 그는 좀더 넓은 세상, 하나의 시대가 지나가고 다른 시대가 도래하면서 가치관의 충돌과 혼란을 경험하는 세상을 환기시킨다. 레이 영화의 미묘한 매력은 그처럼 (외부로) 확대된 시선과 동시에 집중과 투시의 시선 역시 마련해준다는 점에 있다. 스스로 ‘사사로운 일을 다룬 영화’(the intimate cinema)라고 부른 그의 영화들은 내밀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를 말이 아닌 이미지를 도구로 해서 감지하게 만든다. 예컨대, <차룰라타>에서 주인공 차룰라타가 젊은 남자 아말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그것의 고조와 동요를 효과적이면서도 매혹적이게 알려주는 것은 차룰라타나 다른 어떤 이의 직접적인 설명이 아니라 그네를 탄 그녀의 이미지들이다.

여기서 보듯 레이에게 영화란 (다른 위대한 영화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시각적 스토리텔링의 매체를 의미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바로 그와 동시에 영화가 무엇보다도 그가 소재로 취했던 현실, 그 위에 발을 딛고 선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이해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저런 오류들에 이길 수 없는 인간들로 이뤄진 레이의 세계에서는 고집스럽게 자부심을 지키려 한 로이(<뮤직 룸>, 1958년)도, 어쩔 수 없이 타락의 길로 접어들어야 하는 솜낫(<중개인>, 1976년)도 공감과 이해의 손길로 어루만져진다. 장 르누아르는 자기만의 사연들을 가진 인간을 그릴 줄 아는 시네아스트로 기억된다. 레이 역시 그의 뒤를 따르는 또 다른 위대한 휴머니스트였다.


추천 상영작

길의 노래

샤티야지트 레이의 회고에 따르면, <길의 노래>를 만들 당시 자신을 포함한 스탭 가운데 영화를 만들어본 경험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이 만든 영화는 나중에 인도 시골 마을의 평범한 일상을 모범적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대하(大河)의 평온함과 숭고함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벵골의 시골 마을에 사는 가난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삶과 자연의 불가해함에 대한 이야기에 잘 접목한 이 영화는, 시정(詩情)을 품은 이미지들로 구축된 ‘순수영화’의 한 경지를 보여준다.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레이(와 인도영화)의 존재를 서구에 알렸다는 점에서도 <길의 노래>는 영화사의 중요한 한 지점을 차지하는 영화다.

뮤직룸

<길의 노래>에서 <아파라지토>(1957), <아푸의 세계>(1959)로 이어지는 이른바 ‘아푸 3부작’이 가혹한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면, <아푸의 세계> 이전에 만들어진 <뮤직룸>은 고상한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귀족의 피를 물려받은 제후 로이는 과거의 영광을 거의 떠나보낸 상태다. 그는 성대한 음악회를 여는 데 열정을 쏟느라 재산과 가족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리대금업자로 돈을 벌어 우쭐대는 이웃에게 지기 싫어 또다시 돈을 들여 음악회를 마련한다. <뮤직룸>에서 레이는 마치 리어 왕을 연상케 하듯 완강한 인물의 이야기를 빌려 삶의 양식으로서의 자부심의 문제, 한 시대의 종언과 가치관의 대립에 대해 흥미로운 탐구를 수행한다. 주인공의 운명을 시각화하는 레이의 재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차룰라타

레이는 가정이란 제한된 공간을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여하튼 남성보다는 더 생기가 있고 상황에 좀더 잘 대처하는 여성들을 영화에 담곤 했는데, <차룰라타>는 그 같은 레이적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다. 19세기 후반 식민지 인도의 부유한 집안. 정치 신문을 펴내는 일에 몰두하는 남편으로 인해 아내인 차룰라타는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때에 남편의 사촌인 젊은 남자 아말이 집안에 들어오면서 그는 차룰라타의 내밀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정치, 사랑, 야심, 재능 등의 문제들이 농축된 소우주로서 차룰라타의 집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암시나 우회의 방식으로 은근히 드러내는 이 영화는 세심한 주의력을 요구하고 또 그에 응하는 만큼 보상을 주는 작품이다. 레이 자신은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라며 <차룰라타>에 대한 만족감을 표한 바 있다.

중개인

<중개인>을 만들 즈음, 레이는 세상이 온통 타락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 타락한 세상 혹은 타락하게 만드는 세상을 분노한 젊은 세대의 그것처럼 대단히 날카로운 눈으로 들여다보는 음울한 블랙코미디 하나를 만들게 된다. <중개인>은 대학을 막 졸업한 청년 솜낫이 어떻게 점차 순수함을 상실하는 쪽으로 향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많은 회사에 지원서를 보내봤지만 취직이 되지 않은 그는 우연히 길에서 만난 아는 이를 통해 ‘사업’의 세계로 들어선다. 공급자와 고객 사이를 연결하는 ‘중개인’이 그가 할 일이다. 하지만 결국에 솜낫은 그가 하는 일이 가장 나쁜 의미에서의 중개인, 즉 뚜쟁이 노릇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센티멘털리즘의 길로 빠질 수도 있는 이 시점에서 레이는 비판과 공감이 묘하게 섞인 시선으로 윤리적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며 그런 함정을 빠져나간다.

가정과 세상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원작을 각색한 <가정과 세상>은 원래 레이가 데뷔작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었다.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실패했던 이 프로젝트를 그는 30년이 훨씬 지나서야 실현해냈다. 그것도 그의 건강이 나빠지는 바람에 영화는 아들의 손에 의해 완성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가정과 세상>은 레이의 노고가 아낌없이 투입된 그의 후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야기는 가정 안에서만 살았던 여인 비말라, 그를 세상 밖으로 꺼내오려는 지식인 남편 니킬, 비말라의 눈길을 끄는 정치적 행동주의자 산딥 사이에서 펼쳐진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비말라의 가정 안에 바깥의 ‘세계’가 침투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영화는 그 과정 안에 헌신과 배신, 전통과 모더니티, 내부와 외부, 의지와 운명, 명분과 실리 같은 대립항들을 빼곡히 그리고 섬세하게 헤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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