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베트남은 끝나지 않았다, <허공에의 질주>
2001-02-15

우리가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시작한 것은 1994년이다. ‘역사는 끝났다’는 후쿠야마의 일갈이 한국의 지식인사회를 휩쓸고, 회의와 냉소가 밀물처럼 밀려들던 그 무렵에 우리는 엉뚱하게도 ‘베트남’을 떠올렸다. 20세기가 어떻게 지리멸렬하게 정리되어도 좋다. 그러나 20세기를 통과하면서 한국사회가 베트남에 진 빚에 대해서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고 우리는 믿었다. 한국은 베트남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미국을 따라, 미국이 지급한 무기를 들고 ‘잘못된 전쟁’에 가담하여 베트남인들의 심장을 겨누어야 했다.

베트남 전쟁은 20세기를 통과한 인류의 기억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이 전쟁에서 미국은 치욕적인 패배를 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초라한 적들에 자신들이 왜 그토록 고전해야 하는지를 전쟁 동안 알지 못했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왜 패배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미국이 만든 ‘베트남영화’를 볼 때마다 서글프게 확인한다.

<지옥의 묵시록> <메탈자켓> <굿모닝 베트남>. 나는 미국이 생산해낸 수많은 ‘베트남영화’들을 보면서 그들의 빈곤한 철학이 씁쓸했고, 그들이 지닌 치유불능의 미국 우월주의에 화가 났다. 할리우드가 만든 모든 영화는 미국의 우월주의를 선전하는 국책 홍보영화라는 규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리버 피닉스의 전율적인 눈빛이 압권인 <허공에의 질주>는 ‘성분’이 다른 영화다.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하다가 쫓겨다니게 된 부모와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아들의 갈등 속에 시대정신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허공에의 질주>는 가슴뭉클한 정서적 공감까지 자아내고, 많은 ‘미국 국책 홍보영화’들이 애써 외면해 온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치부를 통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연 돋보인다.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굴복시키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 그것이 전쟁이다.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정치적 수단으로 행해지는 전쟁으로도 이루지 못한 것을 미국은 영화로 이룰 수 있을까.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품 안에서 부귀를 누린 극소수를 제외한 베트남 사람들 누구에게도 미국은 정의가 아니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미국은 자신이 베트남 총인구의 10%에 육박하는 260여만명을 살육하고도 왜 패배해야 했는지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베트남에서 참으로 난폭한 전쟁을 수행한 자신의 국가가 ‘불의’, 그 자체였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미국의 영화는 20세기 인류의 영혼에 깊이 각인된 베트남 전쟁의 진실에 끝내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베트남 전쟁을 다루려는 영화 <슬로우 블릿> 제작을 위해 여러 차례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이는 반레라는 시인이다. 그는 이미 비중있는 소설을 발표해 온 작가로도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 영화감독으로 유명하다. 경력과 재능, 어느 쪽으로 보아도 베트남의 국영 ‘해방영화사’ 간판감독인 그이지만, 자신을 한마디로 소개해야 할 때면 언제는 그는 ‘시인’이라고 말한다.

영화와 관련된 일로, 영화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그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시인 반레’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굳이 자신의 정체성을 시인으로 고집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한동안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기만 했는데, 그 웃음 끝에는 우수가 묻어 있었다.

열세살의 나이에 자원입대해서 미국과의 ‘해방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그는 ‘전선’에 있었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와 함께 전선에 나갔던 소년들은 거의 모두 미제 탄환의 밥이 되거나 부비트랩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하나뿐인 목숨마저 기꺼이 나눠줄 수 있었던 친구들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미국의 시각으로는 결코 드러낼 수 없었던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통렬하게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 과제가 당신에게 있지 않으냐고 물었을 때, 반레 감독은 처음보다 더 쓸쓸하게 웃었다.

“정말 멋있고 용감하고, 재능있던 친구들은 전쟁중에 다 죽어버렸다. 나는 그런 극영화를 만들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나는 내 친구들이 모두 죽어간 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머지않아 시인 반레의 길고도 고통스러운 노래가 끝난 자리에서 피어나는, 참으로 눈물겨운 베트남의 진실이 담긴 영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인 5만6천명은 지구의 무게만큼 무거운 의미를 지닌 채 죽어가고, 베트남인 260만명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어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방현석/ 소설가·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회장·작품집 <내딛는 첫발은> <내일을 여는 집> <십년간> <아름다운 저항> <당신의 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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