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그의 마지막 날들, <라스트 데이즈>
2005-11-2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1994년에 세상을 등진 시대의 아이콘,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구스 반 산트의 영화적 주술에 의해 <라스트 데이즈>로 다시 태어난다. 구스 반 산트는 전작 <엘리펀트>처럼 감정과 인상의 포착만으로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거의 10여년 만에 부활한 커트 코베인의 모습은 마이클 피트가 재현해내는데, 그건 정말 커트 코베인의 재림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영화 속에서 그 이름은 커트 코베인이 아니라 블레이크다.

숲속을 헤매고 있는 블레이크. 뭔가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그는 그냥 보기에도 뭔가 이상해 보인다. 블레이크라 불리는 이 주인공은 성공한 뮤지션이다. 그러나 그는 죽도록 외로워 보인다. 숲속 어딘가에 있는 그의 커다랗고 휑한 저택, 친구들은 거기서 술마시고 떠들고 노래를 부르지만, 블레이크가 안식을 느끼는 것은 그 큰 집이 아니라 옆에 딸린 조그맣고 아늑한 별채다. 끊임없이 음반 제작을 추궁하는 프로듀서가, 반갑지 않은 전 부인이,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이 찾아오지만 블레이크는 누구에게도 영혼을 맡길 의지가 없다. 그리고 커트 코베인이 그랬듯 그 누구도 사인을 모른 채 블레이크는 세상을 뜬다.

구스 반 산트는 아주 기이한 영화를 선보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을 근거로 이야기를 짠 것이라기보다 그 ‘마지막 나날들’에 커트 코베인이 느꼈을 법한 심리적 혼란들을 이미지화한 것에 가깝다. 그 이미지들은 숨이 막힐 듯하고, 그 사이사이에 블레이크의 절규가 떠돈다. 전작 <엘리펀트>를 보고도 사람들은 놀랐지만, <라스트 데이즈>는 같은 방식으로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영화다. <라스트 데이즈>는 한마디로 ‘실재의 잔영’을 이미지화한 새로운 창조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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