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박흥식·설경구 취중진담
2001-02-15
글 : 문석
글 : 최수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사랑? 보석 혹은 일상”

한 남자와 여자의 시냇물 흐르듯 잔잔한 사랑 이야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별다른 사건도, 커다란 감정의 출렁임도 없는 이 영화는 일상의 자그마한 풍경을 짜임새 있게 늘어놓는 최근 멜로영화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여자가 자신이 품은 사랑의 감정을 남자에게 솜이 물에 젖듯이 자연스레 전달하는 것처럼, 관객의 마음을 구석에서부터 서서히 장악해나가는 이 영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까지 맡았던 박흥식 감독이 정성스레 파놓은 ‘함정’과 곳곳에 숨겨놓은 ‘덫’ 덕분에 영화는 단순한 멜로영화로 간주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갖게 됐다. 문제는 그 ‘특별한 것’을 이루는 각각의 성분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점. 꽤나 영악한 영화인 듯하면서도 때론 너무나 순진한 구석이 엿보여 허술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작품을 해독하기 위해 <씨네21>은 조력자를 구해야 했다. 사실 이 만만치 않은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었다. 바로 영화에서 궁상맞은 노총각 봉수 역할을 능청스러울 정도로 잘 소화했던 설경구 말이다. 영화에서 워낙 봉수라는 캐릭터가 강하다는 점뿐 아니라 현장에서 박 감독과 원활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었던 인물 중 하나였던 그는 이 제안을 쾌히 수락하며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인터뷰가 술을 마시며 진행돼야 한다는 것. 이 ‘취중 인터뷰’는 그가 평소에도 워낙 술을 즐기기로 소문난 애주가였기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영화 현장 밖에서는 대인기피증이 있는 듯한 인상까지 주는 과묵한 성격의 박흥식 감독의 성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인터뷰는 대학로의 한 한식집에서 시작, 맥줏집을 거쳐 허름한 소줏집에서 막을 내렸다. 설경구가 박흥식 감독을 날카롭게 몰아붙이지 못할 것을 우려해 동석한 기자(물론 기우에 불과했지만)들의 존재를 의식했던 탓인지 인터뷰의 형식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돼버려 아쉬움이 남았지만, 사실 내용적으로는 두 사람이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아쉬웠던 점은 이날의 만남이 꽤 많은 양의 알코올과 더불어 진행된 탓에 인터뷰 내용의 상당 부분이 알코올 성분과 함께 휘발되었다는 것이긴 하지만. 편집자

박흥식(이하 박) | 저희는 대화를….

설경구(이하 설) | (말을 끊고) 굉장히 많이 했어요.

박 | 한 1분 이상 안 해요. (웃음) 대화를 별로 안 해요. 이거 어떤 거 같으냐, 해서 괜찮다 그러면 그게 오케이에요.

촬영현장에서의 ‘대화’를 이렇게 엇갈리게 기억하던 이들은 술이 한 순배 돌고난 뒤 장장 6시간이나 지속된 취중진담을 시작했다.

한잔은 고백 - 데뷔작 끝낸 감독, 떨리고 또 설레고

박 | 영화 개봉할 때까지는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개봉하는 건 영화가 제 손을 떠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개봉하기 전까지는 내 손아귀 안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개봉하고 나서는 제 손을 떠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관객시사를 할 때는 계속 갔는데 개봉하고 나서는 딱 한번 들어가서 보고는 더 안 봤어요. 볼륨 조정이나 색보정이 이상하다는 것도 더이상 내가 할 얘기가 아니다 싶어서 얘기를 안 했고.

설 | 믹싱 끝나고 색보정 끝나기 전에 전화해서 “이젠 내 손을 진짜 떠나는 것 같아” 하더니 그 다음날 색보정까지 다 끝나고 시사회 전날, 또 전화해서 “내 손을 진짜 떠났어” 그러대요. 그래서 제가 “아니, 뭐 입양 보내?” 했죠. (일동 웃음)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장난이 아니에요. 난 이런 감독 처음 봤어.

박 | 내가 발가벗겨진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그게 좀 창피해요. 처음으로 기자시사회 하는데, 전도연씨하고 경구씨하고 내 옆에 있었는데 전도연씨가 내 팔을 꼭 껴안고 영화를 제대로 못 보더라구요. 막 벌벌 떨면서 봐요. 아무리 톱스타고 대배우라도 영화를 처음 보는 느낌에서는 관객, 기자들의 반응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더라구요. 근데 내가 손을 슬쩍 뺏어요. 나도 떨리니까…. 영화를 제대로 못 보고, 숨이 턱턱 넘어가더라구요, 숨이. 사람들은 웃는데, 난 웃지도 못하고. 기자들 웃는 게 꼭 비웃는 것처럼 들리고. 영화를 많이 했다는 배우도 이 정돈데 싶더라니까요. 영화 끝나고 나서 기자들하고 인터뷰하는데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르겠더라고요.

설 | 모든 감독이 자기 영화에 애정이 있겠지만, 이 사람처럼 울려고 했던 사람은 처음 봤어요.

(사진기자가 건배하는 장면으로 사진촬영을 하자고 하자)

박 | 근데 지금 얼굴이 빨개가지고….

설 | 색보정 해주신대! 내가 오늘 형을 너무 씹었나?

박 | 아니야.

설 | 뭐 늘 하는 얘기잖아. 우린 솔직해져야 하잖아. 인간적이잖아.

(더 가까이 붙어보라고 하자)

설 | 우리 안 친해요.

박 | 이게 제일 이상한 거예요.

설 | 맞아요, 설정하는 거, 설정 너무 싫어.

두잔은 회고 - 주연 캐스팅, 그 감격의 순간

박 | 두 양반 없었으면 영화화하기 힘들었죠. 전도연, 설경구 이 두 양반. 다른 배우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남자배우는 미상이었어요. 그런데 마침 시나리오 건네는 날 설경구씨 매니저가 옆에 있었어요. 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이창동 감독님하고 작업을 많이 했고, <박하사탕>에서 설경구씨 연기하는 걸 보고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런데 내가 프로포즈한다고 될지, 무거운 작품, 진지한 작품 하다가 라이트한 걸 하자면 본인이 거절할 것 같더라구요.

설 | 나는 오히려 감독님이 거절할 것 같던데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 배우는 오히려 라이트한 걸 하고 싶겠죠. 바꿔보고 싶으니까. 근데 감독은 안 불안하겠어요?

박 | 이 양반 말은 별로 믿을 게 못되구요. 아마 이창동 감독님이 개인 느낌으로 시나리오를 괜찮게 봤던 것 같아요. 그것에 의해서 내 이야기를 좀 들었던 모양이에요. 출연하겠다고 하기에 그럼 좀 기다려달라, 완고가 나올 때까지. 그래서 최종 원고가 나오고 나서 딱 한번을 보였어요, 시나리오는. 그전까진 저하고 얘기만 했죠. 왔다갔다하면서. 시나리오를 보여달라고 했는데 안 보여줬어요.

설 | 진짜 안 보여주더라구요. 이창동 감독님은 딱 한마디 했어요. “은행원 얘기야, 별 얘기는 없어.” 그것뿐이었어요. 한 사나이가 있어서, 이 사나이는 이랬어, 뭐 이런 게 아니구.

박 | 뭐 정확한 얘기네. 은행원이 살아가는 얘기고, 은행원이 어떻게 살다보니까 사랑을 얻는 얘기야. 뭐 그런 얘기지. 근데 그건 아실 거예요. 전도연씨가 처음에 거절했었어요, 남자 중심 영화라고. 근데 나중에 원주쪽을 후반부에 강화하니까 하겠다고 그러더라구요. 일지를 시나리오 쓰면서 시작해서 꼬박 일년을 썼거든요. 거기에 모든 기록이 다 있는데, 전도연씨 캐스팅된 날이 6월18일인가 그래요.

설 | 어떻게 날짜를 기억하냐? 감격적이었구나…. (웃음) 나 캐스팅된 날은 모르지.

박 | 그것도 기록돼 있어. 내 기억으로는 1월 말인가 그랬을 거야. 신인감독이 다 겪는 일이긴 한데, 현실적으로 스타가 캐스팅되지 않으면 영화되기가 힘들어요. 특히 내 영화 같은 경우는 내러티브가 확실한 것도 아니고. 감정을 쫓아가는 거니까 스타가 없이는 영화화하기가 힘들어요. 그걸 알고 있었고, 캐스팅이 안 되면 영화가 무산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작업을 했죠.

세잔은 시비 - 감독은 왕따였다?

설 | 박흥식 감독은 적이 많아요. 나없으면 왕따야. 찍어놓고 영 찝찝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스탭들이 좋아할 리가 있나. 왜 지가 찍어놓고 흔쾌해 하지를 않아. 뭐라도 아는 척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 가서 혼자 고민하고….

박 | 데뷔감독이 영화현장을 즐길 수 있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많이 물어보는데, 실은 잘 모르거든. 그래서 거꾸로 내가 스탭들한테 물어보잖아? 그러면 또 불안해 해. 라스 폰 트리에 감독도 <어둠 속의 댄서> 찍고서는 지옥 같은 영화현장이었다고, 다신 안 한다고 했다지. 그러고도 다시 찍는 게 영화감독이야.

설 | 그렇게 말은 해도 라스 폰 트리에 그 사람은 현장에서는 즐겁게 일했을걸.

박 | 나는 영화현장이 안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 만들어진 상황에서 관객이 영화에 공감하면 그땐 보람을 느끼고 기쁘지만. 안 좋은 반응도 있긴 있어요. 싸이더스 홈페이지에 어떤 사람이 돈이 아깝다고 썼는데, 그 사람한테는 정말 내가 돈을 주고 싶더라구.

설 | 아니, 형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화면에서 쪽팔리는 건 나하고 도연인데, 감독이 그러면 배우들이 섭섭하지.

박 | 감독은 왕따예요, 왕따.

설 | 밥 먹으러 가면 상 쫙 차려져 있는데 혼자 먹을 때가 있어요. 왜 스탭들은 감독 옆에 안 오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촬영감독한테나 조명감독한테도 안 오려고 하고 자기들끼리 뭉치려고 해요. 흥식이 형도 불쌍해. 하긴 나한테도 안 오니까.

박 |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얘는 숨소리 빼고는 죄다 구라예요.

설 | 아니, 내가 감독이라면 혼자 안 있고 스탭 있는 데로 내가 가겠어. 저는 가거든요. 그런데 외로운 게 좋은 것 같기도 해, 현장에선. 어떻게 보면 감독이 외로운 직업인 게 맞는 것 같아요. 또 현장에선 외로운 것이 어울려요.

박 | 그게 왜 외롭냐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래요. 정말로 내가 이 영화를 이렇게 찍으면 좋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는 감독은 없을 거예요. 임권택 감독님도 마찬가지이실 거예요. 물론 워낙 영화를 오래하셨으니까 스탭들을 어떻게 힘을 주고 끌고 나가야 하는지는 동물적으로 잘 아시죠. 그렇지만 데뷔감독들은 그것도 잘 몰라요.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난 정말 모르겠고, 내가 찍고자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 싶으면 혼자 고민할 수밖에 없잖아요. 스탭들에게 물어봐도 스탭들은 관성 때문에 또 영화를 빨리 찍고 싶으니까 좋다, 괜찮다 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요. 근본적인 부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결국 감독이에요. 감독은 생각을 해야 하거든요, 어떻게 표현돼야 하는가를. 그런데 그런 걸 주위에서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어.

설 | 그게 아니고 주위에서 말 시켜도 안 들려. 감독이란 사람들은, 말을 시켜도 안 들리는 사람들이 감독이란 사람들이에요. 자기 생각에 너무 빠져 있어서.

설 | 감독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미친 짓을. 진짜 외로운 직업인 것 같아요.

박 | 시나리오 쓸 때가 제일 힘들어요. 저는 한국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실력은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컷을 나누는 방법, 연기를 연출하는 방법, 기본적인 컨셉 이런 건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를 잘 만든다, 테크니션이다 하는 김성수 감독 같은 특별한 분들 빼고는 허진호 감독, 이창동 감독 같은 사람들 보면, 영화 만드는 실력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창동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시나리오가 90%라고, 그게 정곡을 찌르는 말인 게 한국영화에선 시나리오가 정말 중요해요. 할리우드에선 영상매체에 대해선 영화적으로 접근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 영화감독들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익숙하거든요. 그렇지만 한국 텔레비전하고 영화하고는 많이 다르죠. 텔레비전은 설명을 하려 든다면 영화는 설명을 안 하려고 하잖아요. 차이가 심한데 텔레비전 피해 때문에 영화감독들의 실력향상이 없어요. 그러니까 시나리오가 중요하다고요. 그런데 시나리오 단계에서 작가들의 도움을 참 못 받아요. 저도 이번에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제가 99% 쓰고 나머지 사람들이 계속 시나리오를 써서 주는데 제 코드에 맞을 때만 쓰고 그렇지 않으면 제가 수용을 못 했어요. 영화사에서 각색작가도 붙여줬어요, 드라마가 약하니까 드라마를 한번 강화시켜보라는 거였죠. 그런데 영화 속에 드라마가 들어오니까 영화가 망가지더라구요. 태란이하고 원주하고 나중에 만나서 언니 동생을 하고 그런 식이었죠. (일동 그건 아니라며 웃음) 그걸 제가 보고나서 이렇게 영화가 되면 영화를 안 하는 게 낫겠다 했죠. 도저히 안 되겠다, 나 혼자 쓰겠다 하고 최종적으로 한달을 혼자 작업했어요. 영상원 친구 학생하고 같이. 디테일을 강화한 거죠.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건네주면서 “나는 영화를 못해도 좋은데 이게 내 완고이고 더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시나리오로 나는 이런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네잔은 공감 - 주인공 봉수는 ‘보통’ 한국남자

설 | 봉수 안에 많이 들어 있죠, 제 모습이. TV 보고 빈둥빈둥거리는 것도 닮았고, 봉수가 영화 속에서 밝지가 않잖아요. 저도 굉장히 무표정하면서 말도 그냥 툭툭 던져요. 그런 게 닮았죠. 근데 잘 보면 진짜 봉수랑 닮은 사람은 박흥식 감독님인 것 같아요.

박 | 그렇지, 뭐. 나도 범생이였고 취직해서 일도 해봤고, 결혼적령기고. 우리 둘이 한 얘기가 있잖아. 경구씨하고 나하고 전화를 하면서 한 얘기가,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좀 퉁명스럽다. 보수적인 데도 좀 있고, 결국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우리 같은 모습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당신 모습하고 내 모습하고.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라. 감추지 말고, 그냥 우리 안에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거였어요. 한 여섯 번째 촬영 때쯤인가, 봉수가 “나 혼자 살아, 독립했어. 아 맛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걸 찍을 땐데, 스탭들한테서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어요. 그때 이후로 어떤 느낌이 왔냐 하면, 저 친구가 지금 화면 안에서 봉수처럼 놀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찍으면서 본인도 웃더라구요. 여유가 생긴 것 같더라구요.

설 | 근데, 저는 <아내가…>뿐이 아니라 스타일이 원래 그래요.

박 | 맞아요. 아무튼 그때 이후로는 저는 이 사람한테 별로 말을 안 했어요. 현장에 와서 느낌대로 가자고 약속했죠. 내가 현장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설경구씨가 판단을 해서 이건 좋다, 이건 아니다, 하는 식으로. 경구씨는 그 판단력이 굉장히 정확해요. 이건 과장이 아니냐, 하는 것도 용기있게 하자고 하기도 하고. 내가 좀 확신이 없는 것도 있지만…. 감독은 별로 확신이 없어요.

설 | 세상에, 빤스만 입고 출근했다가 다시 들어오는 장면 있잖아요. 그걸 놓고 감독님은 끝까지 오버래요. 촬영 쫑나는 날 직전까지. 자르려 그러는 거예요. 죽어도 못 자르게 했어요.

박 | 그래서 두 가지로 찍었잖아.

설 | 그게 불안해 갖고, 면도 크림 묻히고 나오는 거, 그것도 하나 찍어놨어요.

박 | 그때 이창동 감독이 왔었어요. 이창동 감독한테 내가 이거 오버하는 것 같다 그랬더니, “야, 이거 오버 아니야. 네 영화 속에 이런 거 많아야 돼” 하시더라구요.

설 | 난 오히려 흥식이 형이 너무 겁내는 게 불만이었어요. 저는 그런 사람 얘기를 실제로 들었거든요.

다섯잔은 설전 - 배우와 감독의 차이

박 | 저는 사실, 제 영화 속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하나 있거든요.

설 | (입술을 삐죽거리며) 이 사람이 인색해요, 원래.

박 | 그러지 좀 마. (서서히 신경을 곤두세운다)

설 | 인색하잖아요, 형. 진짜 인색해요. 마음은 안 그런데 되게 인색해요. 별명이 독일 병정이에요.

박 | 어린 봉수가 소나기 맞으면서 뛰어와서 엄마라고 하는 건 원래 시나리오 안에 있었던 게 아니고 제가 데뷔작으로 하고 싶었는데 좌절되었던 성장영화에 있던 거였어요.

설 | 이창동 감독님이랑 일반시사 같이 봤는데 그 장면 딱 나올 때 “상업영화 하면서 예술영화로 시작하네” 하시대요.

박 | 크랭크인한 첫날에 어린 봉수 나오는 그 장면하고 친구에게 염색하지 말라고 하는 장면하고 두 장면을 찍었는데 촬영 중간에 경구씨하고 얘길 했거든요, 마지막에 봉수가 정리를 하고 나가야 할 텐데 무슨 얘기를 하는 게 좋겠냐고. 그러다가 “염색하지 마 이 새끼야”가 어떨까 했더니 경구씨가 좋대요. 홍상수 감독님이 영화 찍을 때 실제 술을 먹이고 찍었다고 하기에 나도 해보고 싶어서 해봤는데, 경구씨가 서태화씨하고 술을 먹는 장면에서 둘이 소주를 9병 마셨어요. 서태화씨가 먹은 것만 6병이 돼요.

설 | 저는 먹다가 물로 바꿨거든요, 그런데 태화 형은 제가 물로 바꾼 건지 모르고 계속 술만 먹었죠.

박 | 아직도 아쉬운 것은, 테스트할 땐 정말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나왔는데 슛을 들어갔더니 그게 안 나오는 거예요. 이 양반이 웃기는 게 에너지가 어느 한순간에 나오면 그 다음엔 없어져요. 그러니까 그 순간을 잘 포착해야 해요. 17테이크를 갔는데 결국은 제가 만족을 못해 설경구가 나중에 나와가지고 자기는 끝까지 아주 징할 정도로 해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새벽은 가까워오지, 날은 다 샜지 더이상 못할 것 같은 거야. 서태화씨가 너무 술에 취해서 안 되겠더라구요.

설 | 그 다음날 전화했더니 어떻게 끝났냐 묻더라구요.

박 | 취해서는 무조건 알았어요 알았어요 하긴 하는데 연기에 대해서 대화가 안 되는 거야. 첫 장면은 내 느낌대로 찍었는데 그 다음 둘이 찍을 때는 완전히 죽상이 되어 있더니 나중에 전화가 왔어요. 어떻게 배우 앞에서 오케이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갈 수가 있냐구.

설 | 기분 좋게 오케이 해줄 수 있는 거잖아요. 오케이! 하면 배우도 기분 좋게 갈 수 있잖아요. 흥식이형은 제일 극찬하는 게 “괜찮다”예요. 한 테이크에 오케이 됐던 건 만화가게에서 찍은 것 하나예요. 잘렸지만. 확실히 감독은 세밀한 데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그럴 때 배우는 짜증나요. 컨셉이 다르거든요, 감독이랑 배우랑.

박 | 이번 영화에서는 모두가 됐다고 했는데 나 혼자 아니라고 했던 게 하나 있었어요. 설경구씨가 신문지 찢는 마술하는 장면이 나는 좀 오버된 것 같더라구요. 첫 번째는 실수를 했고 두 번째 하는데 스탭들도 현장에서 웃느라고 NG날 정도로 다 좋았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는 오버인 것 같더라구요. 촬영감독도 웃느라고 잘 보면 뷰파인더가 조금 흔들렸어요. 그런데 제가 더 가자고 해서 다섯번을 갔어요. 경구씨가 나한테 화를 냈죠.

설 | 또 명함에서 동전 옮기는 마술할 때도 짜증났어요.

박 | 한번도 짜증을 안 냈는데 마술할 때 짜증을 냈어요.

설 | 뒤에 연결이 어떨지 모른다고 또 찍게 해요. 너무 짜증나더라구. 그러고서 두 번째 걸로 썼잖아요. 내가 막 했어요, “아까 것을 쓸걸” 하면서. (일동 웃음) 배우도 개겨야 돼요.

여섯잔은 사랑타령 - 원주는 뽀뽀하고 싶은 여자

설 | 형, 우리 영화 보면 왜 사랑이 보석 같은 거다, 마술 같은 거다, 싶다가도 또 굉장히 일상적이잖아. 형이 생각하는 사랑, 그것도 궁금하던데.

박 | 사랑은 보석 같은 것이기도 하고, 일상이기도 하지. 사랑하기 전에도, 사랑하고 난 뒤에도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아.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지 모르고.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랑에 빠질 때 짧지만 빛나는 순간이 있잖아. 그래서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같은 영화, 정말 좋아해. 어릴 때부터 미용사를 사랑해서 미용사의 남편이 되는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하는 미용사 아내. 그런데 그 여자가 왜 사랑의 절정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물에 몸을 던지잖아. 그 사랑의 순간을 지키고 싶었던 거겠지. 난 그 정서에 공감해. <일 포스티노>에서 남자가 여자랑 게임을 하며 구애하는 순간도 그런 느낌이 있어서 좋고. 그 전후가 크게 달라질 것 없더라도, 그런 순간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 <나도 아내가…>에서는 그런 순간보다 일상을 위주로 했는데, 다음에는 좀더 가보고 싶어. 인공적인 드라마가 아니면서도, 일상이 근간이 되면서도, 일상의 삶에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격정적인 순간을 담아보고 싶어. 누가 누구를 만나서 사랑한다는 건 사는 모습의 일부야. 봉수가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태란이었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태란이는 자기 곁을 떠났잖아. 옆에 누가 없는 상태에서,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야. 누가 떠나간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또다른 사람을 찾게 되지. 거기에 집착해서 평생 그 여자만을 기억하면서 살겠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자기는 정말 사랑했다고 생각해도 떠나가버리면 또다른 사랑을 찾는 게 사람이라고 생각해. 영화 속에서 봉수가 쉽게 태란이를 접고 원주에게 가는 이유는 그게 살아가는 일부이기 때문이야. 나는 정말로 시나리오 데뷔작으로 첫사랑에 대한 얘기를 담으려고 했어. 그런데 내 모습을 내가 반추해봤더니, 첫사랑을 생각하느라 내가 매일 괴롭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됐어.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나는 다른 여자를 또 만났다구. 또 그 여자랑 잘 안 되고나서는 또다른 여자를 찾았고. 지금 나는 결혼은 아직 안 했지만, 정말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해주고 나랑 통할 것 같으면 나랑 살 수 있는 여자가 되는 거지. 경구씨는 원주랑 태란 중에서 누구를 택하겠어?

설 | 설경구가요, 봉수가 아니고? 당연히 원주죠. 현실적으로 태란은 이혼녀잖아요. 밑지는 장사잖아요. 태란이랑 나랑 서서히 나도 모르게 깊게 빠져든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하룻밤 잤다고 남자가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물론 그러고 나서 확 빠져들면 이혼녀고 뭐고 상관없겠지만, 시작인 상태에서는….

박 | 봉수가 태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도 했잖아요, 그렇지만 제가 경구씨에게 물어봤어요, 이혼녀인 태란에게 쉽게 결혼까지 할 생각까지 갖겠느냐고. 그랬더니 “그렇지 않죠” 하더라구요. 그럼 왜 좋아하는 거냐 했더니….

설 | 성적인 거지.

박 | 제 영화의 기본적인 컨셉은 ‘뒤통수 바라보기’였어요. 원주가 봉수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봉수가 태란이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그런데 누구 하나가 뒤통수 바라볼 상대가 없어졌을 경우에는 누구하나가 시선을 돌려주기만 하면 마주볼 수 있게 되는 게 아니겠냐. 근데 제가 인터뷰를 하면서 보니까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헤매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요. 나중에 아니다 싶을 때는 자르기도 확실히 잘라요. 미련을 많이 남기고 아쉬움을 많이 남기는 것은 오히려 남자쪽이 강하더라구요. 여자들은 확실해요, 확신이 있어요.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할 거다, 나는 이 사람이 좋다, 혹은 이 사람은 나하고는 아니구나 싶으면 자른다고요. 선이 확실해요. 그런데 나는 원주가 봉수를 좋아해주는 마음에 여자는 남자보다 확신이 있고 강한 모습이 비쳐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바보같이 헤매던 봉수만 나중에 살짝 시선을 한번 돌려줘라, 그러면 이건 성립이 되는 거다라고 생각했어요.

설 | 나는 시나리오 보고 봉수는 진짜 매력없다고 생각했고 원주가 너무 예뻤어. 뽀뽀해주고 싶은 여자다, 이 여자는. 진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다 싶었어요.

일곱잔은 결심 - 사랑하면, 표현하리라

박 | 다음 작품 할 때도 변할지 안 변할지 모르겠는데, 저는 확신이 없으니까 저를 의심을 해요. 거기서 오는 게 커요. 내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스탭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하는데 저는 표정이 얇아서 금방 드러나나봐요.

설 | 못 속여, 못 속여. “에이 이 씨발놈들아” 할 때는 하고 끝나면 “자 술먹자” 하고 가는 것. 어차피 그날 해결될 일이 아닌데, 주변이 불편한 거야. 눈치보게 만드는 거야. 그냥 화끈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멋이거든요. 하긴 감독이란 사람들이 현장에서 화끈할 수가 없어요. 저 같으면 더 할지도 몰라요. 순간 탁 털어버리고 주위를 여유롭게 만들어준 다음에 혼자 고민하면 되잖아.

박 | 그런데 영화를 떠나서 보통 사람으로서 대인관계상 내가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그건 그 사람에게 확실히 표현해야 하겠다는 건 이 영화에서 원주를 통해서 내가 배웠어요. 적극적으로. 스스로 내가 배운 것이 그거예요. 모더니티 비슷한 문젠데, 지금은 표현하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누가 사랑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표현해 줘야 하고, 이 배우를 좋아한다 그러면 이 배우에게 표현해 줘야 하고, 이 장면이 좋다면 그 표현을 해야겠다, 앞으로는. 나도 앞으로 결혼도 해야겠고 여러 가지를 해야 할 텐데. 내가 만나는 사람한테는 꼭 표현해야겠다는 걸 배웠어요.

설 | 흥식이 형은 굉장히 디테일한 사람이야. 짜증날 정도로. 배우들은 정말 힘들어. (손가락을 조그맣게 하며) 아, 그 좆만한 디테일 때문에 똑같은 걸 몇번씩 찍으니까. 그러고는 꼭 첫 번째 걸 써요. 다음 영화도 디테일로 할 건가?

박 | (웃으며) 다음 작품 제의가 들어오고 있어. 근데 다음에는 드라마를 하고 싶어. 하지만 디테일은 모든 영화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어. 드라마 구조가 인위적이지 않으면서 “줄거리가 있구나” 하는 영화를 하고 싶어. 난 할리우드영화도 좋아하거든. 어떻게 말하면 난 드라마가 있는 영화를 부러워하기도 해. 일본영화를 보면 디테일이 다 존재하거든. 디테일은 기본이야.

설 | 그 영화, 저도 껴달라고 그랬어요.

박 | 공감하실지 모르겠는데 첫 장면은 제가 생각해놓았어요. 아주 어색한 부모님 생일파티. 다들 아시죠? 부모님 당사자만 좋아하고 주변의 식구들은 아주 어색해하는 느낌이 영화의 첫 장면이에요. 닭살이지만 해야 하는 행사잖아요. 그게 영화의 시작이거든요. 제가 그걸 갖고서 한번…. 한국 사람들이 외국 사람이랑 달리 가족간에 표현하는 사랑이란 게 되게 역설적인 것 같고, 서툴고 그렇지만 거기에는 사랑 이상의 진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걸 내가 한번 그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영화 전체를 표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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