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거대한 폐공장에서 촬영 중인 영화 <흡혈형사 나도열> 현장. 여자 스탭 한명이 철구조물을 사닥다리 삼아 건물 2층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2층에서 볼 일이라곤 조명 다루는 일밖에 없어 보이는데, 설마, 조명부일까? 조명부였다. 정지연이란 이름의 스물네살 그녀는 <흡혈형사…> 조명부 서드. 정혜영이란 이름의 스물두살 아가씨는 조명부 막내였다. 비바람에 쓰러지게 생긴 HMI를 붙들러 나간 지연씨와 조명 스탠드를 들쳐업고 현장을 가로지르는 혜영씨는 둘 다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그래서 두껍고 커다란 점퍼를 입은 모습이 눈사람 같다) 어디선가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예! 예!” 하며 그쪽으로 튀어간다. 선배 조명부원들이 사진 예쁘게 찍으라고 설치해주고 간 키노 조명 앞에서 “점퍼 벗고 찍어도 될까요?” “안경 벗고 찍어도 될까요?”라고 하는 모습을 보니, 거울 볼 시간이라도 잠깐 내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 조명부로 들어오게 됐나.
=정지연: 원래 사진에 관심이 있었는데, 사진을 배우더라도 생계유지가 필요하고 사진에 도움도 될 것같아서 조명을 시작했다. 방송쪽 조명을 하다가 <미스터 소크라테스>로 영화를 시작했다. 하다보니 매력이 있어서 계속하고 있다.
=정혜영: 촬영과 조명에 관심이 있었다. 영화과 1학년이고, 교수님의 단편영화를 돕다가 그 현장에서 충무로 스탭을 만났는데 ‘조명 한번 해볼래?’ 해서 학교에 재직증명서 내고 현장에 오게 됐다. 2주 됐다.
-촬영장에서도 조명부 일은 제일 힘들다. 여자라서 더 힘들지 않나.
=정지연: 진짜 힘들다. (웃음) 몸이 안 좋기도 했었고, 내가 이걸 왜 하나, 그만두고 싶다, 할 때도 많았다. 그래도 힘든 것보다는 일의 매력이 더 크다.
=정혜영: 힘들 거 알았다. 근데 그렇게 안 힘들다.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것 같다. (웃음) 지시가 내려오면 바로바로 못해서 속상한 건 있지만 체력적으로는 힘들지 않다. 내가 또 추위를 잘 안 탄다. 더위는 많이 타지만.
-조명의 매력이라면.
=정지연: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려운데, 조명은 그림자놀이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재미있다. 사실 방송 조명은 되게 정신없고 스피드가 최대 관건이다. 영화 조명은 훨씬 디테일하다. 시간적 여유가 되니까.
=정혜영: 빛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게 멋진 것 같다. 물론 그것도 내가 하는 건 아니고 조명감독님이 하시는 거지만.
-조명을 계속할 생각인지. 조명감독이 되고 싶은 꿈이 있나.
=정지연: 현재로선 그렇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자기 자리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서 현장에 있는 거 아닌가?
=정혜영: 꿈이야 당연히 그렇다. 여자 조명감독이 되고 싶다. 현재 충무로에 여자 조명감독님이 2명인가밖에 안 계신다더라. 각오는 그렇지만, 아직도 배울 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