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해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개구리 군복을 입고, 남자 아해도 여자 아해도 활보한다. 지난해엔 군복 아랫도리만 돌아다니더니, 올해는 야상 윗도리까지 쌍으로 돌아다닌다. 꼰대는 반감이 치민다. ‘어떻게 군복을….’ 아해들은 몸으로 말한다. ‘군복이 어때서? 멋있잖아!’ 꼰대는 생각한다. ‘군대 많이 좋아졌군.’ 그토록 싫어했던, 그토록 통속적인 그 말을 승인한다. 아해들아, 너희의 ‘밀리터리 룩’은 한국에서 더이상 군대가 ‘공포증’의 대상이 아님을 보여주는구나. 거꾸로 대한민국 군대의 민주화를 증명하는구나(물론 아직 멀었다).
한 아해가 영화를 만들었다. 스물여섯의 윤종빈이 만든 영화는 군대에 대한 이야기다. 꼰대는 생각한다. ‘어라? 여태까지 제대로 된 군대 영화가 없었네.’ 아해는 대답한다. 군대는 ‘맨 정신’으로는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고. 대한민국 예비역들이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었다고. <용서받지 못한 자>는 맨 정신으로 군 시절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비로소 한국은 군대를 미화하지 않고 응시할 수 있게 됐다. 이것도 역시, 역으로 군대가 좋아졌기 때문일까.
대한민국 군대를 제대로 다룬 최초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는 ‘대한민국 군바리 삼총사’가 등장한다. 타고난 군인 체질인 태정(하정우), 변절한 저항자인 승영(서장원), 무력한 고문관인 지훈(윤종빈). 이들은 감독의 말대로 “대한민국 군대 어디에나 있는” 전형적인 세 부류의 인물들이다. 그런데 전형적인 인물의 캐릭터가 고루하기는커녕 생생하게 다가온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제대로 이야기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희화되거나 미화되거나 비하되지 않은 형태로 말이다.
한국의 군대 시절은 두 번째 사춘기다. 군대에서 사람은 남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가 필요하다. 태정은 승영에게, 승영은 지훈에게 아버지가 된다. 이들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유사부자관계가 만들어진다(한국에는 유사부자관계를 일컫는 ‘군대 용어’도 있는데, 흔히 ‘업무적’으로는 사수와 조수, 좀더 ‘사적’으로는 아버지 군번과 아들 군번으로 부른다). 아버지(태정)는 아들(승영)에게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기 때문에 빛이 난다는 ‘물광 철학’을 가르치고, 무슨 질문이든 짧게 대답하라는 ‘언어 규칙’도 알려준다. 하지만 그들의 친밀감은 군대의 구조와 충돌한다. 그래서 승영은 태정에게 사고를 쳐서 미안하다고 편지를 쓴다. 태정이 승영 때문에 집합을 걸고 구타를 하지만, 둘만 남자 “미안하다”고 말한다. 구조 속에서 고립된 우정은 심지어 달콤하다.
어쩌면 한국 남성은 군대에서 여고생과 가장 가까워진다. 누군가와 내밀한 감정을 나누지 않고는 거대한 구조의 폭력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말이 안 되는 사회일수록 말이 통하는 사람이 간절한 법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찍는다. 승영은 모두가 고문관이라 여기는 지훈을 혼자서만 “괜찮다”고 생각한다. 태정과 승영은 서로에게 규율을 위해 가면을 써야 하는 ‘군인의 얼굴’을 벗고 ‘민간인의 얼굴’을 보일 수 있는 상대다. ‘사제 친구’이기 때문이다. 승영은 지훈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면 운동선수 하고 싶어”라는 난데없이 솔직한 고백을 한다. 지훈은 승영에게 “제가 밖에서는 좀 나갔습니다”라고 남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자랑도 한다. 이렇듯 서로에게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이들의 관계를 애틋하게 만든다. 구조가 각박할수록 우정은 긴밀한 법이다. 어느새 그들은 서로에게(특히 아들에게 아버지는)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 된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흐른다. 아버지는 떠나고 아들은 남는다. 승영은 태정이 제대하자 군생활에 적응한다. 저항을 포기한다. 저항하는 자는 복종하는 법도 안다. 이제는 승영의 아들인 지훈의 선택이 남는다. 승영이 군대에 대한 저항으로 스스로 선택한 ‘정치적’ 고문관이었다면, 지훈은 “신속, 명확, 정확”과는 거리가 먼 타고난 고문관이다. 지훈에게는 변절을 선택할 여지도 없다. 자상한 아버지였던 태정과 승영이 차가운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유약한 아들인 승영과 지훈에게는 위기가 닥친다. 태정과 승영의 관계는 군대 밖으로 확장된다. ‘탈영한’ 승영이 ‘제대한’ 태정을 찾아오는 것이다. 승영은 집요하게 태정을 쫓아다닌다. 우연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태정의 여자친구는 승영의 고백을 막는 걸림돌이 된다. 승영은 태정에게 “계집애처럼 졸졸 쫓아다녀”라고 면박을 준다. 태정이 승영을 혼자 남겨두고 떠나자 승영은 결단을 내린다. 마지막 의지처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두 번째 사춘기
<용서받지 못한 자>는 대한민국 남성의 좌절한 성장담이다. 두 번째 사춘기의 홍역을 겪는 남성들의 버디무비다. 그들은 군대라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거대한 구조는 사적인 관계를 만든다. 구조는 관계에 책임을 전가하고, 자취를 감춘다. 이제 양심있는 자, 구조의 무게를 온몸으로 떠안고 가책에 시달리고, 용서를 갈구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군대 내 자살에 대한 세밀한 주석이자, 한국 남성의 성장과정에 대한 날카로운 소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