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지독한 악역 만나고 싶다”, <아나키스트>의 장동건
2000-04-18
글 : 박은영
사진 : 정진환

수천명의 군중이 운집한 호치민의 공연장. 공연이 끝나고도 해산하지 않은 인파 속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 대기실 안에선 긴급 회의가 열렸다. 장동건의 무대 의상이었던 흰색 양복을 다른 누가 대신 입고 나가고, 팬들의 주의가 흐트러진 사이 빠져나가자는 제안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단 한 사람, 당사자인 장동건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날 좋아하는 사람들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 그러니 인파에 휩쓸려 넘어진 아오자이 차림의 소녀를 직접 일으켜주는 내용의 CF가 턱없는 과대포장은 아닌 셈이다.

베트남으로 귀화하라 거나, 대선에 출마하라는 농담도 인사처럼 듣는 요즈음이지만, 남들이 ‘신드롬’이라 부르는 베트남에서의 인기몰이를, 장동건은 아직도 “놀랍고, 고맙고, 부담스럽다”며 마냥 쑥스러워한다. <마지막 승부> <의가형제> <모델>이 베트남 전파를 타면서 시작된 ‘장동건 열풍’으로, 이제껏 베트남 땅을 두번 밟았는데, 늘 경호원 여러 명이 따라붙어 움직이는 부자유스런 일정이었다고. “한국과 정서가 비슷해서 드라마가 어필한 덕이고, 작품 이미지 덕”이라고 짐작할 뿐, 뚜렷한 이유는 그도 아직 찾지 못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한국 제품의 매출이 늘었다는 얘기도 종종 전해 듣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열성 지원군만 있는 건 아니다. 한국문화 열풍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베트남 당국에서 한국 드라마를 규제할 움직임도 보이고,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사건까지 불거져, 그는 요즘 꽤 복잡한 심경이 돼 있다. 혼자 몸이 아니라는 자각, 진정한 스타의 면모를 그도 조금씩 갖춰가는 것이다.

데뷔 초기의 폭발적인 성원, 주춤거린 몇몇 출연작으로 식어버린 관심들, 이제 다시 먼 타국에서 누리게 된 뜻밖의 인기.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복도 적잖았지만, 인기가 뭔지, 새삼 우쭐해 하진 않는다. <마지막 승부>를 할 때 어린 친구들의 환호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눈으로 확인하려 할 게 아니라, 먼저 배우로서 신뢰를 쌓아가자”고 어렵게 맘을 다잡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넘어지고 쓰러지며 몸바쳐 찍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도 결과적으로 그의 연기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대선배 안성기, 박중훈과 호흡을 맞추면서, 장동건은 “배우가 현장에서 할 일은 연기만이 아니라, 연기할 수 있는 여건을 스스로 만드는 일”이란 걸 배웠다. 그리고 자신의 ‘캐릭터’보다 ‘작품’을 먼저 보는 눈을 키웠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을 받고 나서, “별로 안 좋지? 축하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며 조심스러워 하는 반응들에, “기분좋다”고 명쾌하게 응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작품이 쌓여 갈수록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한뼘씩 넓어지는 느낌이, 스스로도 흐뭇한 눈치다.

<아나키스트>를 만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보기 드문 남자 영화”라는 생각에 먼저 맘이 끌렸다고 했다. 그가 연기한 세르게이는 20년대 상하이에서 활동한 무정부주의 테러단체의 명사수로, 고문 후유증으로 아편에 손을 대 조직의 골칫덩이가 되는 비운의 인물이다. 출연 분량도 많지 않고, 대사도 많지 않지만, 새로운 면모를 선보일 기회라는 생각에 즐겁게 임했다고. 옛 정권이 의도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의 기록을 지웠다는 사실에 화가 났던 기억, 벽을 차고 점프해 총을 쏘는 등의 고난도 액션을 대역없이 치러낸 뿌듯함이 아직도 생생한 듯했다. 조만간 TV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에도 얼굴을 보일 예정. 그는 이제 또다른 작품을 만나고 싶어했다. 여전히 멜로에 매혹되곤 하지만, “다른 사랑을 경험하고, 느낌에 변화가 올 때까지는” 자제할 생각이라고. 당분간 “몸이 힘들더라도 많이 움직이는 영화, 관객까지 공모자로 만드는 지독한 악역”을 찾아보고 싶다고 말하는 청량한 목소리가, 머리칼에 물든 초록빛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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