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란 엘리슨은 미국의 독자적 예술로 재즈, 뮤지컬 등과 함께 ‘만화’를 꼽았다. 지금은 만화 역시 예술의 당당한 일부이자 소통의 매체로 인정받지만, 그러한 인식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가 채 못 된다.
많은 사람들이 만화의 인식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해 왔는데, <배트맨> 시리즈의 제작지휘자인 마이클 유슬런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인디애너 대학에 최초로 만화 관련 강좌를 개설한 인물로, 그 이전까지 예술은 커녕 ‘웃긴 책’ ‘싸구려 장르’ 정도의 취급만 받았던 만화를 진지하게 다루고자 했다.
<배트맨> 1편의 메이킹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먼저 부각되는 사람도 바로 유슬런인데 그가 만화 강좌를 개설하기 위해 학장을 설득하던 과정이 정말 ‘걸작’이다. 그는 학장에게 ‘박해를 뚫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켰던’ 성경의 모세 이야기를 말해달라고 한 뒤, 학장이 즐겨 읽는다는 슈퍼맨의 탄생 과정을 상기시킨다. 학장은 줄거리를 다 말하기도 전에 ‘강좌 개설을 허가하네’라고 설득당했다는 것.
유슬런의 강좌는 만화계의 환영을 받았고, 마침내 DC 코믹스에 스카우트된 그는 ‘배트맨을 심각하고 어두운 원작 그대로 영화화하고 싶다’는 의향을 전한다. 그것이 바로 <배트맨>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유슬런은 영화화를 통해 배트맨을 만화라는 틀에서 벗어나오게 하고 싶었다. 만화 캐릭터가 만화를 벗어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나 큰 일. 그러한 극약처방을 통해서라도 유슬런은 만화가 대중과 학계에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