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과거는 끝내 살아 돌아온다, <용서받지 못한 자>
2005-12-14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한국현대사의 기억에 대한 무서운 알레고리 <용서받지 못한 자>

<용서받지 못한 자>에는 이상한 반복이 두번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휴가 나온 상병 승영이 여관 욕조에서 자살했을 때 일어난다. 자살한 승영을 발견한 태정(승영의 제대한 고참이자 중학교 동창)이 피가 흥건한 욕조 옆에서 흐느낀다. 암전 컷으로 이어진 다음 장면에서 승영은 여전히 그 욕실에서 악몽을 꾸는 듯 눈 감은 채 벽에 기대 앉아 있고, 욕실 전체를 잡은 다음 숏은 전전 숏과 거의 비슷한 각도로 죽은 승영과 앉아 있는 태정을 잡는다. 태정은 왜 그곳을 빨리 나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걸까. 혹은 왜 이야기의 전개상 불필요해 보이는 비슷한 장면이 이어져 있을까.

두 번째는 마지막 장면에서 일어난다. 겨울비가 내리는 연병장 한 귀퉁이에서 병장 태정이 아직 군인 물이 덜 든 일병 승영을 타이르고 있다. 그들 앞에 어리버리한 이병 지훈이 나타나 중대장의 말을 전하고 간다. 그런데 태정과 승영이 나누는 대화는 그들이 훨씬 전에 다른 장소에서 나눈 대화와 완전히 똑같다. 물론 그때는 지훈이 없었다. 그들은 왜 다른 시점에 다른 곳에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까. 혹은 그것이 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선택됐을까.

지체와 순환- 은폐와 망각의 이상한 대립항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와 결말이 모두 이상한 반복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두 반복의 양상과 효과는 약간 다르다. 인물의 심리적 상황과 연관된 전자의 반복에서는 서사의 지체가 일어나며, 집단의 요구와 연관된 후자의 반복에선 서사의 순환이 일어난다. 요컨대 서사의 지체가 죽음 옆에서 이루어지며, 서사의 순환이 군대에의 회귀로 이뤄진다. 가장 피하고 싶은 대상 옆에서 시간이 멈추며, 가장 멀리하고 싶은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 이건 무서운 일이다. 더구나 그 대상과 공간은 긴밀히 연관돼 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고 이야기는 전진해야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서사의 논리적 요구이면서, <용서받지 못한 자>의 인물들에겐 필사적 욕망이다. 그들은 군인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야 하며, 고참에게 “내가 너 같으면(너처럼 제대할 날이 멀다면) 자살한다”는 말을 듣는 이병도 기필코 제대의 날을 맞아야 한다. 제대한 예비역이 가장 꾸고 싶지 않은 꿈은 다시 입대하는 것이다. 지체와 순환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으며, 그것은 반드시 제압되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서사 안에서 지체와 순환의 대립항으로 설정된 건 은폐와 망각이다. “지훈이 걔 잘 하냐?”라는 질문에 승영은 “음, 뭐 그냥”이라고 대답한다(그 시점은 이미 지훈이 자살한 뒤다). “그 친구는 잘 돌아갔어?”라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태정은 “그래 잘 돌아갔어”라고 대답한다. 그에 앞서 태정은 군대 얘기를 자꾸 상기시키려는 승영에게 “군대 시절은 까마득하게 다 잊었어”라고 말한다. 실은 잊은 게 아니라 잊으려 하는 것이며,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려 한다. 태정이 승영을 앞에 두고 여자친구에게 말하는 군대 이야기는 조작된 영웅담이다.

무엇보다 제대해 회사원이 된 태정은 아직 군인인 승영을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다. 아주 오랜만인데도 태정은 “어제 외박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봐야 한다”고 말하며 만나기를 회피했고, 억지로 만난 뒤에도 둘이만 있기 싫어서 기어코 여자친구를 불러낸다. 여자친구가 화가 나서 가자 태정은 참지 못하고 승영에게 “너는 역겨워”라고 말한다. 군대 시절에 태정이 마지막까지 승영을 보호하려 했음을 기억한다면 태정의 태도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태정의 모순된 태도는 어떤 설명 없이도 즉각적인 공감을 일으킨다.

공감의 이유는 명확하다. 태정에게 승영은 묻고 싶은 과거로부터 온 초대받지 않은 방문자다. 혹은 과거의 기억 자체다. 그것은 과거로 되돌려져야 한다. 돌려보낼 수 없다면 그것을 죽여야 한다. 승영의 자살 혹은 죽음의 이유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부하인 지훈을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그를 자살로 내몬 것에 대한 자책이다. 하지만 그 자책만으로 자살을 택하는 건 과잉 행위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은밀한 욕망이 작용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온 그를 묻어버리고 싶은 태정의 욕망이다. 여자친구와 정사를 벌이려던 찰나에 쫓아보낸 줄 알았던 승영이 여관 바로 앞에서 전화를 했을 때, 승영은 그 존재 자체가 악몽이 된다. 그 존재는 끔찍하고 역겹다.

태정은 왜 승영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지 않았나

다시 물어보자. 태정은 왜 승영의 죽음 옆에서 지체했을까. 태정이 승영에게 욕하고 나갔다가 술을 사들고 다시 여관으로 온 시간은 별로 길지 않기 때문에, 그 시간에 승영의 숨이 완전히 멈췄을 거라고 짐작하긴 힘들다. 그렇다면 그는 왜 즉시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만일 죽음이 확인됐다 해도 왜 즉시 경찰에 알리지 않았을까. 태정은 유능한 군인이었으며, 정이 있으면서도 언제나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낼 줄 아는 이성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승영의 죽음을 목격한 직후에, 악몽을 꾸는 듯한 얼굴로 그 옆에 가만히 있었을까(태정이 피로 물든 욕조에서 승영을 발견한 다음 숏에서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됐을 때, 그것은 나쁜 일이 일어난 다음 그 일이 악몽이었음을 보여줄 때 사용되는 낯익은 촬영과 편집이다).

그 짧고도 긴 지체의 시간은 태정의 악몽이면서, 동시에 태정의 욕망이다. 그 지체에는 승영을 살해하려는 태정의 욕망이 작동한다. ‘(만일 승영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조금만 기다리면 완전히 숨을 멈출 것이다.’ 승영은 태정에게 지훈의 죽음을 말하려 하지만, 끝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반면 태정은 승영의 죽음을 말할 생각이 전혀 없다. 자신의 무의식이 그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승영으로 인해 중단된 섹스를 속개하고, 게를 게걸스럽게 먹는다.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얼버무리며 한 말을 화장실에서 연습한다. “그래, (승영은) 잘 돌아갔어.” 은폐와 망각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시도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온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모두 군대로 다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재인지 꿈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전에 승영은 결말 장면과 비슷한 꿈을 꾸었다. 그 꿈은 뒤죽박죽이다. 지훈과 승영과 태정이 밤거리에 사복 차람으로 앉아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데, 지훈은 처음엔 반말을 했다가 나중엔 다시 깍듯이 존대말을 쓴다. 반면 결말 장면은 실재처럼 매끈하다. 그러나 그들이 이전의 어떤 장면에서와 완전히 똑같은 대사를 쓸 때, 그것은 악몽의 과거 혹은 과거의 악몽이 된다. 그들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추악한 과거의 기억에 관한 영화다. 그때 그들은(혹은 우리는) 피해자였거나 영웅이었다고 강변하지만 실은 모두 가해자였다. 과거의 실재가 등장하자 우리는 그것을 미필적 고의로 살해한다. 죽음은 결국 말해지지 않고 우리는 조작된 말을 연습한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살아 돌아온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나다 해도 군대의 인류학이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기억에 관한 무서운 알레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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