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한 무리의 인간들이 조용히 필사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 구절을 처음에 읽었을 때에는 ‘필사적’이라는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렇다. ‘필사적’은 힘이 세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조용히’가 더 와 닿았다. 초등학교 칠판에 종종 써 있던 말이다. ‘조용히’, 이 말은 힘이 없다. 그런데 붙여놓고 보니 ‘필사적’보다 ‘조용히’가 더 필사적으로, 처절하게, 잔혹하게 느껴진다.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있었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같은 책까지 나왔을 정도니까 그야말로 <매트릭스>에 대해서 나올 말은 다 나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영화는 좀 다른 각도에서, 즉, ‘조용히’와 ‘필사적’의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영화의 주인공인 미스터 앤더슨(네오)은 회사원이지만 본업인 회사원보다는 해킹에 더 열중하는, 약간 한심한 청춘이다. 일단 등장하는 순간부터 맹하다. 멍하게 졸고 있는 그에게 갑자기 세상이 와락 달려든다. 모니터에는 이상한 메시지가 뜨고 엉뚱한 사람들이 그의 지저분한 방으로 찾아온다. 회사에 가서는 상사한테 불려가 야단을 맞는다. 정리하자면 앤더슨은 ‘조용히 필사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아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프로그래밍도 곧잘 하는 그는 대도시의 멀쩡한 사무실로 출근하는, 크게 절박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사람이다. 모험이 사라진 시대에, 오직 가능한 모험이라곤 해킹뿐인 세상에 살고 있는 이 청춘은 그래서 낮은 대충 보내고 대신 밤에 눈을 번뜩이며 해커들의 세계를 떠돈다.
그런데 ‘도발적 사건’과 더불어 앤더슨의 이 대충대충 인생은 끝난다. 이상한 택배가 배달되고 고층빌딩 난간에서 아슬아슬한 추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스미스 요원에게 붙들린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그를 취조한다. 여기서부터 앤더슨이 발견하게 되는 세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조용히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이다. 스미스 요원과 그의 동료를 보라. 영화 초반, 지붕을 넘어뛰며 트리니티를 추격할 때의 그 집요함을. 이를 악문 채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게 화면 밖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대충 버티는 앤더슨을 취조할 때는 또 어떤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진지하게 집중하고 있다. 어찌어찌 스미스 요원에게서 탈출하면 그곳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모피어스와 트리니티 등이 살고 있는 ‘진짜 세계’. 그러나 이 세계도 앤더슨이 보기엔 역시 ‘조용히 필사적으로’ 사는 곳이라는 점에서 스미스 요원의 세계와 같다. 밥 같지도 않은 꿀꿀이죽을 먹고 괴물 같은 적들과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다 정말 죽어버리기도 한다. 이건 심심풀이 해킹과는 격이 다른 삶이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매트릭스 속에서 천진하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닐까?’ 고민하는 사이퍼 같은 자도 있다. 오직 앤더슨만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으로, 세상이 ‘조용히 필사적으로’ 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세상이 이랬던 거예요?” <매트릭스>의 조연들은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너만 몰랐던 거야. 세상은 원래 이랬어.”
<매트릭스> 시리즈가 2편, 3편으로 가면서 별로 재미가 없어진 것은 어쩌면 미스터 앤더슨이, 아니 ‘그분’께서, ‘조용히 필사적으로’ 사시는 쪽으로 전향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편을 지배하던 내면의 갈등은 사라지고 우리의 네오는 세상의 이 쓸쓸한 이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2편, 3편에서는 그저 죽도록 싸우고 또 싸울 뿐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네오와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조용히 필사적으로’ 굴러가는 세상을 되도록 외면하면서(혹은 외면하다가) 그러나 실은 ‘조용히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