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돌아왔다. 장진영에 대한 글은 이렇게 시작하고 싶었다. ‘언니’라는 호칭이 손위의 여성을 향해야 하는 거라면, 혹은 허물없이 가까운 지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장진영을 그렇게 부를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장진영에겐 같은 여성이기에 감지할 수 있는 ‘언니스러움’이 있다. 그가 <소름>에서 보여준 연기의 깊이나 <싱글즈>에서 체현한 독신녀의 희로애락에서 연기를 넘어선 삶의 내공 같은 것이 느껴져서였던 것 같다. 함께 수다 떨고 싶고 고민을 털어놓고 싶어지는 이웃집 언니의 품, 그런 친근함. “작품뿐 아니라 제 실제 모습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안티가 별로 없는 걸 보면, 제가 ‘비호감’은 아닌가 봐요. (웃음) 너무 여자이려고 노력하거나,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요.” 장진영이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 박경원이 되었다는 영화 <청연>의 소식은, 그래서 전혀 놀랍지 않았다. 이 언니, 이제 형님으로 거듭나겠구나, 하는 예감이 잠시 머리를 스쳤을 뿐.
<청연>은 여배우라면 누구나 탐냈을 법한 작품이지만, 경쟁에 붙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주인공 박경원은 진작부터 장진영으로 낙점돼 있었다. <소름>으로 호흡을 맞췄던 윤종찬 감독은 <싱글즈> 촬영 말미에 만난 장진영에게 <청연> 이야기를 꺼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널 추천하더라”고 전해 주었다. “감독님하고 다시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데다, 시나리오가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무엇보다 박경원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와닿았어요. 누구나 바라는 일이지만,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기란, 너무 어렵잖아요.” 모든 작품을 배우에게 주어지는 선물로 생각한다는 장진영에게 <청연>은 거대한 물음표로 시작해 느낌표로 남은 영화다. “모델도 없고, 너무 막막한 도전이었어요. 매순간 한계에 부딪히는 느낌이었는데, 그럴 땐 다시 부딪혀서 할 수 있는 만큼 해내는 수밖에 없었죠. 이 작업을 하면서, 더 적극적이 되었고 도전에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전엔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많은 걸 두려워하고 살았거든요. 촬영 끝나고 쿠바, 하와이, 일본, 프랑스, 싱가포르를 돌아다닌 것만 해도 그래요. 떠나는 걸 쉽게 생각 못했거든요. 막상 떠나보니까, 너무 불필요한 걸 두려워하면서 살았구나, 너무 어리석게 살았구나, 이젠 달라져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부산에서 촬영하고 있는 영화 <보고 싶은 얼굴>에 대해 물으니, 장진영의 얼굴이 금세 새치름해진다. “작부 역할”에 대한 선정적인 궁금증인가 싶기도 했고, 적어도 이 인터뷰 자리에선 <청연>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까닭이다. 인터뷰 막간, 장진영은 예쁘게 포장된 새 휴대폰을 조심스레 가방에 밀어넣었다. 저녁에 만날 윤종찬 감독에게 건넬 선물이라고 했다. 시사회 무대에서 근사하게 선보이도록 옷 한벌도 준비해두었다고 했다(장진영씨, 미리 누설해서 죄송합니다). “저한텐 가족 같아요. 아버지 같은 분이죠. 영화 만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이에요. 영화가 잘돼서 감독님이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요. 중국에서 촬영하는 동안 CF 촬영 때문에 한국을 드나들었는데, <청연> 소문이 흉흉하더라고요. 현장에 돌아와 그런 얘길 전했는데, 아무 동요가 없는 거예요. 소문과는 180도 달랐다고 할까. 큰소리 한번 안 났고, 불협화음 한번 없었어요.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현장이었어요. 다들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순간, 장진영의 커다란 눈망울에 불끈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은 대작의 흥행을 짊어진 주연배우의 조바심이나 부담감보다는 가족 친지와 함께한 노력이 보상받길 기도하는 소녀의 간절함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