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情人의 눈매, 광대의 품성, <왕의 남자>의 이준기
2006-01-02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왕의 남자>의 공길이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면 세상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왕의 마음을 뒤흔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겁먹은 듯이 올려다보던 첫 번째 시선, 꽃과 나비가 노는 그림자극을 하며 곱게 웃던 눈매, 붉은 댕기를 늘어뜨린 채 무너지던 애처로운 자태. 광대 장생과 연산의 파국에 동행하는 공길은 그 앳된 얼굴에 웃음이 서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지고, 그 하얀 얼굴에 먼지가 닿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내 몸의 상처쯤은 상관없어지는 정인이었다. 그 남자 이준기를 캐스팅한 이준익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을 가졌고, 자신도 모르게 잠재된 끼를 발산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호텔 비너스> <발레교습소> 오디션을 “눈빛이 좋다”는 말로 통과했던 이준기는 오디션을 보기 위해 <왕의 남자> 시나리오를 받아들었을 때 이 영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었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한번 더 읽고, 그래도 이해가 안돼서 한번 더 읽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감독한테 묻고 싶어서라도 오디션을 봐야겠더라고요.” 어릴 적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이준기는 “남들이 보기엔 형편없었겠지만” 정성껏 장님놀이를 준비했고 태껸과 덤블링도 선보여 탐냈던 공길 역을 따냈다. 그러나 재주가 전부는 아니었다. 똘망똘망 말을 잘하면서도 자기는 머리가 나쁘다고 우기는 이준기는 시나리오를 분석하기보다 다소 첫걸음이 늦더라도 배역에 빠져드는 편이고, 말투가 어색하다는 타박도 같은 방식으로 이겨냈다. “<패왕별희>를 보기는 했지만 공길은 지금까지 없던 캐릭터예요. 그래서 누군가 참고해 목소리를 만들기보다 연기에만 집중했어요. 소극적이고 연약하게 연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목소리도 따라 나오니까요.”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되겠다는 마지막 장면 역시 그렇게 연기했다. <왕의 남자>는 처음부터 찍었기 때문에 이준기는 어느덧 영화에 젖어 공길이 되어 있었고, 감우성과 정진영도 장생과 연산군으로 보이게 됐다. 애틋하게 지내온 장생과 마지막인데, 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장면인데,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이준기는 세번쯤 소리를 쳤더니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다시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줄 아래서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외쳤다고 했다. 이준기에겐 그저 장생과 지내는 게 좋고 자유롭게 노는 게 좋은 광대였다는 공길. 그가 그처럼 계산없이 연기하는 동안 관객은 공길을 보며 무수한 상념과 추측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예체능계 공부를 하지 않았던 이준기가 그 나이에 보기 드물게 진지해지며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봄이었다. “친구 선생님이 경성대 교수여서 그 친구랑 연극을 보러갔어요. 옷은 너덜너덜한데 하시는 말씀은 어찌나 주옥같은지. 거기다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까, 아시잖아요(직접 몸짓을 해보이며) 연극배우들 많이 하는 몸짓, 진짜 멋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이준기는 학원비를 빼돌려 연기학원을 다녔고, 학원 등록금이 밀려 집에 전화가 오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들켜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맞은 다음, 서울예대에 가겠다며 혼자 짐을 싸서 서울에 올라왔다. “밤에는 호프집에서 서빙하고 새벽에는 당구장 카운터 보고 낮에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때만 해도 내놓고 연예인하겠다고 말 못하던 시절이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조그만 연습실에서 연기를 배웠고요. 서빙하면서 TV만 봐도 좋았어요. 나도 언젠가는 저런 일을 하겠지 하고. (웃음)”

엄청난 엘리트만 가는 줄 알았던 서울예대에 들어간 이준기는 70, 80차례 오디션을 보며 주눅들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곤 했다. 어른들과 어울려 몇달을 보낸 탓인지 영화와 달리 의젓해 보이던 이 청년이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마음을 내비친 건 그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저 떨어뜨렸던 감독님들이 VIP 시사회에 오셨어요. 어찌나 뿌듯하고 기쁘던지 그날 밤에 잠을 못 잤다니까요. (웃음)” <왕의 남자>에 출연하면 여자 같은 배우로 이미지가 고정되지 않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영화를 찍으며 무작정 좋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이준기는, 요즈음 드라마 <마이걸>에 싸움도 사랑도 능숙한 바람둥이 정우로 출연하고 있다. “제가 같은 실수 두번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영화는 준비할 시간이 많은데 드라마는 없어서 걱정이에요. 내가 가진 것이 많아야 하는데.” 그 때문에 이준기는 또다시 선배들과 작업하는 영화에 출연하고 싶고, 좀더 가진 게 많아지면 연극무대에도 서고 싶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돈을 벌어 그 돈을 몽땅 여행에 쏟아붓고도 싶다. 그런 말들을 늘어놓으며 길고 갸름한 눈매에 웃음이 번지니, 그를 두고 차마 궁을 떠나지 못했던 장생의 심정도 이해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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