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결국 장사치들의 영화일지니, <킹콩>
2006-01-04
글 : 짐 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액션은 많지만 감흥은 없는 <킹콩>

올 연휴, 10t 고릴라, 아니 50t은 될 법한 고릴라가 쳐들어온다. 먼지가 걷히며, 난 동료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 크다, 커!” 피터 잭슨의 3시간짜리 <킹콩>은 별다른 자기 성찰없이 자의식으로 크게 뭉쳐 있다. 1933년 원작에서 탐험가였던 감독 어니스트 B. 쇼드색과 메리언 C. 쿠퍼가 섹스·살육·가학·기괴한 인종들과 특수효과의 소란스러운 혼합으로 빚어낸 모든 굴곡이 지나치게 정상화되어 있다. 잭슨의 광대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일부러 더 날조된 듯한, 궁극적으로 꽤 피곤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프로덕션은 요정 같은 백인 여자(나오미 왓츠)를 향한 정글 괴물 원숭이의 미친 사랑을, 아버지 없는 여자가 궁극적인 보호자를 찾아나서는 <섹스&시티>의 한 에피소드처럼 만들어버린다.

피터 잭슨판 거대한 소프드라마

박스오피스의 성공이 이미 결정된 잭슨의 <킹콩>은 잡스러운 대공항의 배경을 여유있게 보여준다. 영화는 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술 같은 오프닝 몽타주는 센트럴파크에 세워진 대공항 시기의 빈민촌을 보여주고, 고가 전차와 모델 티 자동차로 가득 찬 거리를 회고시키며 나오미 왓츠가 연기하는 대담한 배우에게서 절망적인 보드빌(미국에서 배우, 댄서, 곡예사 등이 출연하던 거리의 쇼)의 느낌을 불러낸다. 하나 세계 제8대 불가사의를 찾기 위해 해골섬으로 가야만 하는 교활한 영화감독, 잭 블랙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당대의 느낌은 사라진다.

블랙이 탄 쿵쿵거리는 신비의 증기선은 꼬박 한 시간이 걸려 유적과 해골들, 선사시대 주민들이 빗속에 용해되어 있는 미니 모도(<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장소), 해골섬에 도착한다. 잭슨은 <킹콩>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를 풀지도 않고 풀 수도 없다. 원작은 영화이자 일종의 증상이었는데 <국가의 탄생>(1915) 이후 백인 우월주의의 가장 과격한 영화적 표현이자 제국주의 환상의 가장 큰 착란이었다. 야만인 떼거리의 손에 부서지는 백인 여자의 스펙터클을 놓친다면 영화를 놓치는 셈인데, 잭슨은 해골섬의 모습뿐 아니라 원주민들도 침을 질질 흘리는 토착 좀비 오크(<반지의 제왕>에서 인간과 대적하는 미개하고 폭력적인 종족)로 다시 사용하고 있다.

장 레비는 초현실주의 잡지 <Minotaur>에서 33년 <킹콩>을 인정하며 “이 영화에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언제나처럼 거스르는 존재들로 보여준다”고 썼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는 액션이 해골섬의 장벽을 떠나 순수한 본능과 무의식적 욕망으로 넘어가는 <킹콩>의 둘째 장에서 그 위대함이 성취된다. “미국 고생물학 교수들이 할리우드를 위해 선사시대 괴물의 모델을 만들어주었다”고 레비는 주목했다.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는 바로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독일 출신 초현실주의 작가)다.”

물론 잭슨의 공룡을 보면 영적 아버지야 스티븐 스필버그이고, 해골섬의 묘사는 떼를 지어 도망가는 공룡들과 지루하게 펼쳐지는 곡예로 가득 찬 2등급 <쥬라기 공원>의 급조다. 한손에 백인 여자를 쥔 거대한 원숭이는 세 공룡과 싸우고 그녀의 인간 애인(에이드리언 브로디)조차 징그러운 벌레들을 뚫고 여자를 찾아온다. 곤충과 연체동물 동맹에 맞서는 포유류(사실 영장류), 또 그에 대항하는 무법한 곰보 파충류라, 아예 생물학적 계급투쟁을 극한으로 몰고 가서 결국 영장류가 승리하니, 영장류의 엄지손가락을 가진 로저여, 엄지손가락을 높이 추켜올려줘라!(로저 에버트, 엄지손가락으로 영화를 추천하고 말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영화평론가)

잭슨의 카메라는 정글 속을 헤쳐가는 왓츠의 모습을 과도하게 보여주는데 그 잠옷은 갈수록 튼튼해진다. 아마 풀어지지 않는 그녀의 슈미즈 어깨끈보다 강한 건 킹콩의 사랑뿐이지 않을까(스트립쇼가 절정에 다다를 수는 없다. 새 <킹콩>에는 원작에서 페이 레이의 가느다란 옷을 벗기고 호기심에 차서 제 손가락을 킁킁거리는 검열된 장면에 견줄 만한 장면이 없다). 앤디 서키스(<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을 열연한 배우)가 연기한 킹콩은 백인 여자의 매력보다 보드빌 광대짓에 더 끌려 자세를 바로잡는다. 왓츠가 영화 내내 계속 ‘연기’를 하고 있지만 특수효과 속 그녀의 모험은 레니 리펜슈탈(나치 선전영화를 만든 천재적 독일 여성 영화감독)에 버금갈 아리아인의 오만함을 지닌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틸다 스윈튼에 비할 바 못 된다.

때때로 잭슨은 자신의 소재에 고전성을 부여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반복해서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인 조셉 콘래드의 소설)을 보여주다니 말도 안 된다(좀 건방지게 말해서 킹콩이야 P. T. 바넘의 <모비딕>이 아닌가). 1933년 원작에 등장하는, 킹콩의 극장 데뷔 때 나오는, 야만인들의 춤을 재현하면서 감독은 포스트모던 건축가가 대체된 유적에서 차용했을 법한 방식으로 원작의 많은 부분을 포함시키고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미드타운을 황폐화시키면서도 킹콩은 아슬란(<나니아 연대기…>의 사자왕 이름)과 같은 능력을 대도시에서 발휘한다. 빈민촌이 사라지고 센트럴파크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가득하니 말이다. 이 황홀한 공간에서 킹콩과 조그만 여자친구는 빙상 위의 마술 쇼를 펼친다.

그녀가 비록 원숭이와 함께 있다지만 완전히 빠져 있지는 않다. <킹콩>은 결국 장사치들의 영화일지니…. 너무나도 긴 상영시간과 넘쳐나는 특수효과 속에서 액션은 많지만 감흥은 없다.

번역 이담형(2005. 12. 13.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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