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테이블 매너 점수는 몇 점이신지. 예전에 <미스 에이전트>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런 의문을 품었었다. 10년 동안 머리빗 단 한 번 사용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여자 산드라 블록(그녀는 FBI 요원이었다)이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움으로써 그녀를 미인대회 출전후보로 손색없게 트레이닝 시켜보려 했던 뷰티 컨설턴트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장면에서였다. 미인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된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미인도 아닌 주제에!)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추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오드리 햅번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우아한 ‘피그말리온'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 버나드 쇼의 소설 <피그말리온>(이 책은 <마이 페어 레이디>로 영화화 되었다)에서 엘리자가 음성학자 히긴스에게 3개월동안 고급 영어를 배웠던 것처럼 나는 기호학자에게 3시간짜리 속성 고급 테이블 레슨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한 가지 불길한 건 젊고 매력적인 그 기호학자가 나의 테이블 매너에 점수까지 매겨주겠다고 한 점이다.
솔직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테이블 오른쪽에 놓인 남의 빵을 덥석 집어먹는다거나 손 씻으라고 놓아둔 핑거볼 속의 물을 벌컥 들이킬 정도로 테이블 매너가 우스운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 기호학자가 나에게 하사한 점수는 겨우 ‘50점'이었다. 아무리 평소에 ‘형식'보다 ‘내용'이고, ‘격조'보다는 '맛', '페라가모'보다는 '아디다스 스니커즈', ‘장동건'보다는 ‘탁재훈'이 좋다는 생각이 나의 정신 세계를 지배해 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50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어쨌거나 기왕 망가진 김에 본인이 50점을 맡게된 경유를 통해 괜히 사람 주눅 들게 만드는 테이블 위에서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신사 숙녀가 되는 법을 살펴볼까 한다.
그 야박한 학점의 주인공을 만난 건 몇 년 전 일요일 오후, 청담동의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였다. 백승국. 그는 프랑스에서 기호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음식문화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하며 국내의 여러 대학과 기업에서 국제 매너를 강의한다는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영화와 요리, 그리고 매너를 멋지게 버무린 <극장에서 퐁듀 먹기>라는 책을 통해서였지만 실제로 만나는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날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나와도 아마 별로 맛은 없을 거예요. 제가 유학 가서 처음으로 어떤 프랑스인 교수에게서 저녁 초대를 받았는데 그때 집에 돌아와서 소화제를 먹고 나서 라면을 끓여 먹었으니까요.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맛은 이미 결정난 거죠. 그런데요, 실은 복잡한 테이블 매너의 목표도 결국 음식을 더욱 맛있게 즐기기 위한 거예요. 그리고 생각보다 굉장히 쉬워요. 정말로 제대로 한 번만 해보면 되요. 오늘처럼요."
그의 말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은 아주 극과 극이란다. 맛있게 먹지만 역시 좀 게걸스러운 타입과 형식적으로 자로 젠 듯한 세련된 매너를 가졌지만 별로 맛있게 먹지는 못하는 타입. 나는 어느 쪽일까 하고 잠시 고민하고 있는 사이 웨이터가 냅킨을 펴주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를 놓칠세라 세련된 냅킨 사용법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lesson 1 테이블에 앉자마자 냅킨부터 펼치는 것은 좋은 매너가 아니다. 식사하기 전에 자연스럽게 피는 것이 좋다. 유럽 사람들은 테이블에서 배를 불릴 목적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심리나 자라온 환경까지 파악하려고 하는데 레스토랑에 들어오자마자 냅킨부터 펼치면 빨리 먹고 가겠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내식을 먹는 것도 아닌데 냅킨을 턱받이처럼 받치는 것도 좀 우스운 태도다. 특히 넥타이 맨 남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
다행히도 나의 냅킨은 아직까지 왕관 모양을 유지한 채 테이블 위에 얌전히 서 있다. 하지만 속으로 나는 턱받이 냅킨을 한 남자는 경우에 따라 좀 귀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매너 강사는 다시 흥미있는 대화거리를 위한 미끼를 던졌다.
“청담동엔 자주 나와서 식사하시나요?"
“아니요. 한 달에 한 번 정도요. 백교수님은요?"
“저도 가끔요. 비싸잖아요. 그런데 청담동 레스토랑에는 대부분 연인들끼리 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하는 말인데요, 식사하는 모습은 첫 번째 자연스러워야 하고, 두 번째 관능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어요. 그런데 그 관능미는 천박한 포르노하고는 달라요. 따라서 게걸스러우면 절대 안돼요. 눈빛이 아주 중요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못하는 게 바로 시선 처리예요. 70퍼센트 정도는 상대방을 바라보아야 해요. 솔직히 1백퍼센트는 부담스럽고요. 상대방이 30~40퍼센트밖에 쳐다보지 않는다면 그건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의미죠. 혹은 거짓말할 궁리를 찾고 있거나. 실제로 경찰서에서 조서 꾸밀 때 범인들이 취조자를 쳐다보지 않는다잖아요. 저는 그걸 ‘작업 매너'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말하자면 식당이 작업하기 가장 좋은 장소라는 거죠. 그걸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바로 프랑스 남자들이에요.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을 보여주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공간이랄까? 여자에게는 자신의 기품과 우아함을 한껏 발휘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고요. 어쨌든 시선 처리를 잘 하려면 일단 어디까지 지키든 테이블 매너 정도는 일단 알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예요. 눈치 보는 상황이라면 매력을 발산할 틈도 없잖아요."
아마도 그의 ‘작업 매너' 얘기를 듣는 동안 나도 모르게 손이 얼굴로 올라갔던 모양이다. 그는 갑자기 내 눈을 응시하며 두 번째 레슨으로 넘어갔다.
lesson 2 식사 중에 머리나 얼굴을 만져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불결하게, 혹은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실제로 불결해서가 아니라 맛의 이미지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전체 요리가 나왔다. 내 선생님 앞엔 라보카도가 결들여진 스모크 살먼과 캐비어 요리가 내 앞엔 에스카르고(달팽이) 요리가 서빙되었다. 세계 3대 전체 요리에 속할 정도로 근사한 전체 요리였지만 실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가 옆 테이블로 날려보냈던 그 문제의 달팽이 요리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 집게와 다리 두 개 짜리 에스카르고용 포크도 보이지 않는다. 아, 이럴 땐 어떻게 하나?
lesson 3 요리나 먹는 방식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웨이터를 불러 물어보라. 외국 사람들은 웨이터에게 자연스럽게 물어보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걸 창피하게 생각하는 게 문제다.
역시 우리의 담당 웨이터는 기쁘게 대답해주었다. “아예 야채와 함께 조리 되어 나온 거니까 편하게 포크로 드시면 됩니다. 그 달팽이 껍질은 그냥 장식이구요. 허브 소스랑 함께 드시면 더 좋구요." 하지만 나에겐 이런 창피한 상황에서 허브 소스를 찾을 경황이 없었다.
lesson 4 한국 사람들은 무조건 나이프를 사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전체 요리는 나이프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특히 카나페나 에스파라거스는 반드시 손으로 집어먹는다. 그리고 빵도 반드시 손으로 뜯어먹어야 먹어야 한다. 매너 지킨답시고 나이프로 빵을 잘라먹는 일만큼 부자연스러운 것도 없다. 또한 샐러드는 나이트로 잘라 먹는 게 아니라 포크로 접어 먹는 것이다.
아, 지금까지는 그런 대로 잘 지켰는데 나는 바로 다음 순간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가 마침 아무 때나 화장실 가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얘기를 할 무렵이었다. 맛의 이미지상 식사 중에는 절대로 화장실을 가서는 안 되고 식전이나 식후에 가야 한다는 말(lesson 5)을 마칠 무렵, 하필이면 그 무렵까지 내내 참았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나는 느닷없이 ‘잠깐 실례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화장실에 다녀오고 말았다. 게다가 화장실에 다녀오기 전 나는 점수를 만회해겠다는 생각에 그 급한 와중에도 무릎 위에 있던 냅킨을 얌전히 개어 놓았는데 그는 그것도 잘못된 매너라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화장실에 다녀온 후 개어놓기까지 한 냅킨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나중에 보니 내 발 밑에 깔려 있었다. 고난은 그렇게 한꺼번에 찾아오는 것인가 보다.)
lesson 6 테이블에서 일어설 때 냅킨은 자연스럽게 던져놓는 게 좋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그가 테이블 위에서 어떤 남자가 가장 꼴불견이냐고 묻자 나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19세기 귀족처럼 접시 위에 치즈를 반드시 6시 방향에 덜어놓는 사람요. 상류가 되고 싶어 날뛰는 아메리칸 사이코 같아요."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관대했다. “맞아요. 저 역시 매너가 엉망인 사람보다 매너에 함몰되어 딱딱한 로버트처럼 보이는 사람이 더 안쓰러워요. 처음에도 말했지만 매너라는 건 결국 더 맛있게, 더 즐겁게 먹기 위한 것일 뿐인데 말이죠." 아, 그래. 지키든 안 지키든 내가 테이블 매너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이 훌륭한 요리들을 더 맛있게, 더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우리는 와인과 함께 최고급 푸아그라와 양갈비 스테이크를 한 시간 동안 아주 천천히 즐겼다. 그리고 식탁에서 피해야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너무 잘 하는, 정치 얘기와 건강 얘기를 피해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자보 레스토랑의 주인처럼 직접 서빙도 하는 팔레드 고몽의 젊은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개인적으로 특별한 요리에 대한 추억을 나누었고, 각각 좋아하는 와인 리스트를 교환했다. 그리고 오자마자 빵그릇 먼저 비우고 앉아 있는 옆 테이블 손님들의 흉도 보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백교수의 레슨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그 하이라이트는 바로 다음 얘기였다.
“유럽 사람하고 한국 사람들은 식탁에 오는 마음가짐부터가 달라요. 프랑스나 이태리 사람들은 식탁에 배를 채우러 오지 않고 오감을 열고 자신의 모든 감각을 자극하러 오거든요. 음악, 공간, 냄새, 분위기, 요리 모두."
“아~, 그렇군요. 그러면 이런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값도 결코 아깝지 않겠네요."
“바로 그거예요. 배만 채운다면 좀 아까운 가격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