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영화 〈왕의 남자〉(이준익 감독)가 관객 500만명 고지를 넘어섰다. 개봉 20일 만에 515만7672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1174만)와 〈실미도〉(1108만)가 이미 관객 1천만명을 돌파했고, 지난해 개봉했던 〈웰컴 투 동막골〉(800만)을 비롯해 다른 8편의 영화도 500만명을 넘어섰지만, 〈왕의 남자〉의 500만명 돌파는 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왕의 남자〉의 스크린 수 변화다. 12월29일 개봉 당시 이 영화의 스크린 수는 전국 255개였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태풍〉이 540개 스크린을 차지하고 관객 몰이의 포문을 열었던 것과 크게 대조될뿐더러, 400곳에서 개봉했던 〈태극기 휘날리며〉와 비교해 봐도 초라한 스크린 수였다. 하지만 〈왕의 남자〉는 개봉 첫주 304개, 2주차 주말 369개, 3주차 주말 388개까지 스크린 수를 늘려왔고 4주차인 17일까지도 361개 스크린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수치는 〈왕의 남자〉가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체인을 거느린 거대 배급사의 ‘막무가내식 밀어주기’의 수혜를 입지 않고도 자력으로 관객 몰이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의 남자〉의 초반 스크린 확보가 녹록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멀티플렉스 씨지브이와 같은 계열사인 씨제이엔터테인먼트의 경우, 순제작비만 150억원을 들여 직접 제작에 나섰던 〈태풍〉을 띄워야 할 당면과제가 있었다. 메가박스(쇼박스)와 롯데시네마(롯데엔터테인먼트), 다른 중·소규모 극장주들 입장에서도 이른바 ‘기획형 블록버스터 영화’도 아닌 〈왕의 남자〉에 많은 스크린을 내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왕의 남자〉는 지난해 한국영화 평균제작비 50억원에도 못미치는 44억원을 들여 제작한 영화다. 극중 공길로 나온 이준기가 영화 개봉 뒤 가장 뜨는 신인 스타로 주목받고 있긴 하지만, 이렇다 할 스타가 등장하는 영화도 아니다. 영화 개봉을 전후로 출연 배우들이 쇼프로그램에 몰려나와 노골적으로 영화를 선전하고 다니는 홍보활동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대박 영화들의 정형화된 공식처럼 돼버린 남북 분단 또는 조직폭력배를 소재로 한 영화도 아니고, 심지어 흥행이 가장 어렵다는 사극이다.
〈왕의 남자〉는 이처럼 멀티플렉스 체인을 거느린 거대 배급사들이 막무가내식 밀어주기를 하거나 극장주들이 안심하고 스크린을 내줄 만한 흥행의 ‘기본 문법’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시나리오, 연기, 연출 등 영화의 ‘기본’에 충실한 내용물을 가지고 극장주보다 먼저 관객들의 마음을 잡았다. 애초 540개 스크린을 잡아놓고도 관객의 마음을 잡는 데 실패한 〈태풍〉(18일 현재 420만명)은 물론, 스크린부터 잔뜩 잡아놓고 관객에게 영화 보기를 강요하는 기획형 블록버스터들과 여러모로 비교가 된다. 또 제작비가 부족해서, 스타가 없어서, 거대 배급사의 후광을 못 입어서 영화를 만들기가 힘들다는 제작자들에도 다시 한번 죽비를 내리치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