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광대들의 외줄타기가 성공한 비결, <왕의 남자>
2006-01-19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사극 <왕의 남자>의 몇가지 미덕과 동성애적 감수성

<왕의 남자>는 외줄 타기로 시작하여 외줄 타기로 끝맺는다. 하늘도 아니지만 땅도 아닌, 생과 사의 경계 어딘가에서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외줄은 운명적인 계급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장생(감우성)의 삶과 닮았다. 물론 이는 선왕을 모방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왕의 권위와 광기의 경계에서 권력의 유희를 펼치는 연산(정진영)이나, 주어진 성적 정체성과 모방하는 성적 정체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여장 광대인 공길(이준기)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공길이 권력의 단맛에 취해가는 원작 <이(爾)>의 정치적 맥락을 삭제하는 대신, 공길을 사이에 둔 연산과 장생의 동성애적 대립을 강화시킨 <왕의 남자>는 왕과 광대를 양극으로 삼는 이상 그 대립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영화는 ‘모방’을 생명으로 하는 재현 예술의 권능을 통해 광대를 왕으로 왕을 광대로 둔갑시키기도 하면서, 서사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연산의 웃음, 왕은 왕 광대는 광대

장생은 광대이기에 숭고한 존재인 왕이 될 수 있는 계급적 초월의 특권을 누리지만, 이를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의 목숨을 판돈으로 내걸어야 한다. 천하디 천한 광대가 숭고한 왕을 모방할 수 있는 근본적 토대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놀이(재현 예술이나 여러 공연)의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왕과 광대간의 ‘계급적 거리’로 인해 가능하다. 연산과 녹수의 애정행각을 모방하여 저잣거리에서 인기를 끈 장생과 공길은 의금부에 끌려와 고문을 받던 중 ‘연산의 웃음’을 내기로 한판을 벌인다. 연산이 자신과 녹수를 풍자하는 연희를 보고 웃는다면 그들은 크게 한몫 잡을 것이고, 그 반대라면 목숨이 지불되어야 한다. 물론 연산은 웃는다. 그것도 박장대소하며…. 장생의 주장처럼 왕이 연희를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닐 수 있는 이유는 그 웃음이 ‘왕은 왕이고, 광대는 광대이고’라는 계급적 거리를 증명하기 때문이며, 이는 또한 현실을 모방하는 재현 예술이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과의 거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왕의 남자>의 외줄 타기 같은 웃음의 특이성은 희극적 장면이 비극의 도래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왕의 남자>의 관객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큰 박수를 보내는 외줄 타기의 청중과 그 쾌락을 공유한다.

연산의 웃음과 대조되는 사건은 광대들이 신하들의 비리를 모방하는 공연에서 발생한다.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시험하려는 예술적 충동(장생에게 이는 ‘죽음 충동’과 상통한다)에 사로잡힌 장생은 궁궐에서의 첫 연희를 마친 후 궁궐의 실세가 대신들임을 알게 되고 그들을 모방한 공연을 준비한다. 그들이 신명나게 한판을 펼칠 때마다 누군가가 작살나는 것은, 죽음 충동을 동반한 예술적 충동이 언제나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연희가 시작되고, 연극 속 대신과 자기 자신간의 거리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 신하들은 그 벌거벗은 모습을 보며 감히 웃을 수 없다. 연산에 의해 처형당하는 신하야말로 웃지 못함으로써 왕에게 자신의 죄를 폭로하는 ‘아는 척하는 바보’이다(<그때 그사람들>을 보며 웃지 못하고 법정으로 이끈 자들이 생각나지 않는가). 연산이 극을 통해 신하들의 비리를 알아채고(또는 바보의 행위를 통해 처형의 명분을 확보하고) 대신의 처형을 명할 때 처선(장항선)의 의도는 ‘일시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처선이 남사당패를 궁궐로 유인한 이유는 재현 예술에 대한 순진한 믿음, 즉 재현 예술이 연산에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간악한 종신들을 가려내는 현실 인식의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광대가 된 연산, 로맨스적 대립의 전제조건

하지만 처선은 미처 알지 못했다. 재현 예술이 현실의 진실을 비추는 거울일 수 있다면, 그 가능성 이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당신이라고 어김없이 확인시켜주는 ‘백설공주’의 나르시시즘적인 거울로도 둔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때로 연산은 연극을 통해 현실의 진실을 인식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는 자신의 상상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관객, 극중 스타(공길)에게 매혹되어 그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고 싶어하는 관객, 심지어 현실과 재현 예술을 구분하지 못하는 최악의 관객에 가깝다. 그가 관객의 여러 층위를 보여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의 남자>의 연산은 <젤리그>(우디 앨런, 1983)의 주인공처럼 고정된 실체없이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화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복합적이기까지 해서 형상화하기가 쉽지 않은 인물 유형이다(게다가 그는 세 주인공 중 한명일 뿐이다). 역사를 소재로 하면서도 그 실증성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이 없는 <왕의 남자>가 연산이라는 실존인물을 차용함으로써 얻은 효과는 영화 속 연산에 대한 여러 설명을 생략하더라도, 이 빈틈이 역사적 연산에 대한 관객의 선지식에 의해 채워짐으로써 다른 극적 요소들을 위한 여분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 여분의 시간 속에 연산과 장생의 멜로드라마적 대립을 강화하고 곳곳에 광대들의 해학을 삽입함으로써 관객의 긴장과 이완의 숨고르기를 가능하도록 한다.

현실과 재현 예술의 경계를 혼돈하는 연산에 의해 발생하는 파국적 상황은 폐비 윤씨의 죽음을 상연하는 경극에서 좀더 자명하게 드러난다. 연산이 ‘관객-왕’에서 ‘주인공-광대’로 도약함으로써 궁궐은 객석이 사라진 연극의 무대가 되고 재현 예술은 모방할 대상을 상실한다. 폐비 윤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후궁들에게 이는 칼바람이, 경계의 흐트러짐이 갖는 파국적 결과를 보여준다면, 신하들이 연희를 모방하여 꾸민 인간 사냥 시퀀스는 공연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공연을 모방하는 전도된 세계를 보여준다. 재현 예술과 현실의 거리를 보증해주던 연산이 연극화된 현실의 ‘주인공-광대’이기를 자처함으로써, 현실과의 거리 속에 유지되는 재현 예술의 숨구멍이 막혀버린 것이다. 즉 현실을 전제로 이를 끊임없이 모방하려 하면서도, ‘현실은 현실이고 예술은 예술이고’라는 거리가 사라진다면 재현 예술은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이것이 재현 예술이 지닌 근본적인 딜레마이다). <왕의 남자>는 현실과 재현 예술의 경계가 흐트러지는 지점 및 중종 반정의 계기를 맞닿게 하지만, 영화가 실제로 공을 들이는 것은 공연 예술(또는 재현 예술)에 대한 자의식적 탐구나 연산조를 경유하는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라 세 남자가 엮어가는 동성애적 로맨스이다.

‘모방의 모방’을 통해 드러나는 감정과 진실

조지 쿠커의 <이중 생활>(1947)이나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1993)처럼, 모방에 성공함으로써 극중 역할과 현실의 자신을 혼돈하는 캐릭터의 연장선상에 공길이 위치한다면 연산은 그 반대이다. 대신들은 선왕을 모방하는 연산을 원하지만 연산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연산이 모방에 실패함으로써 폭군이 되었다면, 그가 그림자극을 통해 아비를 거부하는 아들이 되어야 했던 사건의 모방에 성공하는 순간, 그는 관객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다(공길 역시 관객 중 하나이다). 연산이 모방하는 사건은 그가 실패한 왕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하여, 왕이지만 광대가 되어야 했던 그의 처지를 정당화하고, 광대이지만 왕이기를 바라던 장생과 거울상을 이루도록 한다. 물론 폭군(혹은 타락한 남성)의 트라우마를 강조하여 관객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리 새로운 방식이 아니지만, <왕의 남자>는 이를 드러낼 때마다 예술 형식을 빌린다는 점에서 독자성을 지닌다. 실제로 계급적으로는 연산이, 관객과의 정서적 친밀성에서는 장생이 우위를 점하면서 자칫 밋밋해질 뻔한 대립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모방의 유희를 통해 힘의 균형이 조절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이 아닌 캐릭터 중심의 영화인 <왕의 남자>는 세 남자의 감정을 공연의 형식(공길과 연산의 인형극과 그림자극, 장생과 공길의 외줄 타기)을 빌려 표현함으로써, 영화적 볼거리와 캐릭터의 정서를 동시에 성취해낸다. 특히 영화 엔딩의 외줄 타기 장면은 극을 모방하여 자신의 진실을 표현하는, 달리 말해 진실이 ‘모방의 모방’에 의해 표출되는 <왕의 남자>의 서사적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모방을 통해 광대가 왕이 되고 왕이 광대가 되는 과정이 드러나고, 또한 광대들의 모방 놀이가 희극적 효과의 유발을 넘어서 사건을 축적하고 서사를 추동하도록 한 것 역시 <왕의 남자>의 미덕이다.

<왕의 남자>는 정치와 예술에 대한 여러 흥미로운 관점을 노출하면서도, 이를 심도있게 파고들어 외줄 타기의 위험을 감수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왕의 남자>는 전통적인 삼각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관객의 로맨스적 욕망으로 도피하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왕의 남자>의 로맨스가 동성애적 코드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땅만큼 안전한 지대는 아니라는 점에 그 방점이 놓여져야 할 것이다. 신인 배우 이준기는 여성스럽다 못해 충분히 아름다웠고, 그것이 동성애적 관객은 물론이거니와 이성애적 관객까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로맨스의 정서를 성취하도록 한다(<패왕별희>의 장국영을 상기시키는 경극 역시 이성애적 관객의 동성애적 로맨스에 대한 편집증적 거부감을 완화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아마도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왕의 남자>가 인구에 회자될 수 있다면,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역사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나 계급적인 관점, 예술적인 논평에 관해서라기보다는, 동성애적인 감수성이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한 드문 사례의 하나로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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