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 자살 기도를 한 여자의 칙칙한 무기력감, 알코올 중독자에 폭력 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년의 메마른 그늘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공지영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두 주연배우 이나영과 강동원은 까맣고 큰 눈동자와 작은 얼굴을 반짝일 따름이다.
송해성 감독의 네 번째 연출작이기도 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1월 말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아는 여자> 이후 길고 건강한 휴식기를 가진 이나영의 여자 ‘유정’은 생의 의욕이 불투명한 사람이며, 하늘거리는 몸짓과 슬픈 눈동자가 많은 말을 대신했던 피사체 강동원의 남자 ‘윤수’는 고달팠던 삶과 그럼에도 버려지지 않는 생의 의지를 눈물로 쏟아내는 사람이다. 영화와 캐릭터에 대해 워밍업 중인 두 배우를 미리 만나고 싶었다. 스튜디오 안에 들어선 그들은, 상대 배우에 대한 낯섦과 호감을 뒤섞어가며 사진 촬영 중에 번갈아 쑥스러운 웃음을 터뜨리고는 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이 푸른 천 배경의 사진은 그렇게 끊이지 않던 웃음이 겨우 진정된 뒤에 얻어진, 행복한 사진이다.
여자 ‘유정’, 이나영
“아이, 그냥 신인배우 이나영이라고 불러주세요. (웃음)”
이거 괜한 엄살 아닌가, 슬쩍 떠보지만 그녀의 태도는 꽤 진지하다. 하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문유정은, 최소한 원작소설로 보자면 쉽게 파악하긴 어려운 캐릭터다. 어린 시절의 큰 상처로 어머니와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된 딸. 의미없는 쾌락을 즐기다 어찌어찌 집안 소유 대학의 전임강사 직함을 얻은 망나니. 세번씩이나 팔목에 금을 그으며 세상의 공기와 빛으로부터 스스로를 유폐시키려 한 염세주의자. 그리고 수녀인 고모의 손에 이끌려 사형수 윤수와 정기적으로 면회하게 되는, 그러면서 서서히 변화해가는, 인간. “유정이는 히스테릭하다기보다는 세상에 무관심한 아이인 것 같아요.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뭘 입고 가지? 어떤 향기를 풍겨야 하지? 어떤 자동차를 타야 하나? 이렇게 하나하나를 고민하게 될 것 같아요.” 캐릭터의 고민은 이나영에게 덧씌워진 것 같다. 아직도 캐릭터를 어떻게 몸으로 받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은 탓에 그녀는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은 채, 그저 유정이란 이름만 간직하면서 살고 있죠”라고 말한다. 이나영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유정과 윤수의 관계다. “분명 이성간의 사랑은 아닐 거예요. 유정이 윤수를 받아들인 것은 그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에서 비롯된 건 아닐 거예요. 오히려 스스로를 받아들인 거겠죠. 윤수는 철창 안에서 물리적으로, 유정은 철창 밖에서 스스로에게 갇혀 있는 존재니까요.”
“그동안 영화를 꾸준히 찾고 있었어요. 근데, 제 또래 여배우들이 할 만한 영화가 별로 없었잖아요. 있었어요? 뭐? 뭐?”
지구라는 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엉뚱하고 신기한 모습을 보여줬던 이 ‘외계소녀’는 <아는 여자>를 통해 연기자라는 궤도에 안정적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그후 1년 동안 그녀는 우주정거장에 서서 줄곧 보급만 받는 듯했다. “저도 <아는 여자>의 경험이 좋아서 이제부터 일을 좀 많이 하자, 그랬는데 정말 딱 이거다 싶은 시나리오가 없더라구요.” 그동안 이나영은 몸에 근육을 붙이기 위해 근력운동을 했는데, 오히려 더 깡마른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아는 언니도 보고 살도 찌울 겸 해서 뉴욕에 갔어요. 거기서 출연 결정을 내렸는데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3kg가 쪘다구요. 하하.”
“이나영스러운 게 뭔지 다 잊어버렸어요. 한 1년 꼬박 놀다보니까.”
사실, 이나영이란 존재를 사형수와의 영혼적 교감을 통해 기능정지 상태이던 삶과 사랑을 복원하는 유정이란 캐릭터에 겹쳐놓았을 때 똑 떨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는 건 사실이다. 흠모하는 남자를 접어서 봉지에 넣어왔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아는 여자>의 이연이나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만 배운 내가 대체 뭘 잘못한 거냐”면서도 한 남자를 위해 영어학습 전선에 나서는 <영어완전정복>의 영주를 떠올린다면 유정은 무겁고 갑갑해 보인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이미지 안에 그녀를 가두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변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변신이 어딨다구. 나는 이나영인데.” 그렇다고 언젠가 도전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없는 건 아니다. 그게… 좀… 희한한 캐릭터라서 그렇지만. “시골 아줌마 역할을 정말 해보고 싶어요. 머리 뽀글뽀글하게 하고 화장도 알록달록 진하게 하고 몸뻬 입고서. 왜? 나도 몰라요.” 흠, 그런 엉뚱한 발상이 이나영스러움 아니었나영.
남자 ‘윤수’, 강동원
“연기 가르쳐주시는 선생님 붙잡고 만날 울고불고 난리를 부리고 있어요.”
27년의 삶을 뒤돌아보니, 억울함뿐일 줄 알았는데 미안함이 더 많다며 사형수 윤수는 눈물을 흘린다. 윤수의 폭발하는 감정들이 촬영현장에서도 최대한 빨리 또 충분히 나올 수 있도록 강동원은 요즘 훈련 중이다. 우는 연기를 반복하다보니 연기수업이 끝나면 몸이 녹초가 된다고, 현실적·이성적이어서 감정 제어에도 능한 스물여섯 청년이 말한다. “원작 보고 너무 좋아서…. 깔끔해서 맘에 들었어요. 전 책을 잘 안 보거든요. 근데 이 책은 한번에 다 읽었어요. 괜찮더라고요. 마음이 짠∼한 게 있어서. 캐릭터도 너무 해보고 싶었고. 아픔이 많은데, 이해가 잘돼서.” 윤수가 원작보다 구체화되면서 그의 고향은, 강동원의 고향 경상도로 바뀌었다. 사투리가 인물의 맥락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며 송해성 감독은 무척 맘에 들어했다고 한다. 강동원은 요즘 문서 작업 중이기도 하다. 대사를 죄다 사투리로 바꾸느라 고향 말을 복기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 중얼중얼 자판을 두드리다보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친구야, 내가 지금 하는 이 말이 맞나. “다시 하려니까 잘 안 돼요. 특히 욕 같은 걸 하면 서울말이 나와요. 감정이 들어가도 서울말이 나오고.” 사투리가 어색하다. 고치느라 애먹었던 고향 말이 그에게서 잊혀져가고 있다.
“일에 대한 애착이 더 생겼고, 명료해진 것 같아요. 현장이 좀더 편해졌고…. 또, 사는 게 윤택해지거나 그래진 거 같진 않은데 살 수 있는 게 좀더 많아졌고…. (웃음)”
2003년 드라마 <위풍당당 그녀> 때를 돌아보면서 이런 몇 가지 변화들이 생긴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올 3월이 돼야 연기경력 만 3년을 채우는 그는 드라마 세편을 포함해 어느새 일곱 번째 작품에 들어간다. 담배를 물었을 때나 겨우 생각할 여유를 얻으면서 살아왔을 테니, 사투리를 잊어버린 건 당연하다. 연기는 “한 작품 하고 나면 진짜 조금씩, 조금씩” 느는 것 같다. 촬영현장에서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을, 혼자 모든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형사 Duelist> 때에야 배웠다. 귀를 좀 닫고 살았던 것 같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그가 덧붙인다.
“그래도 저는 항상, 제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중심이 되어서 돌아가야 하는 일이니까….”
황소고집이라서가 아니라, 일에 대해 스스로가 먼저 자신감을 갖지 않으면 다른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라고 말하는 강동원의 자아는 그의 부모님이 물려주신 중성적이고 섬세한 아름다움이나 깨끗한 이미지와도 필요 이상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형사…>의 흥행 성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상처 많이 받았죠. 전혀 예상도 못했고. 제 취향도 대중적이진 못한 거 같아요.” 그리고 말을 이었다. “대중적으로 바꿀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상업적인 것만 선택할 필요는 없잖아요.” 친해지려고 노력 중이며 아직 서먹함이 남아 있는 이나영과의 사진 촬영 때, 좀더 편안하게 치아를 드러내고 웃어보면 어떻겠냐는 기자의 제안에 그는 대답했다. “저는 그렇게는 잘 못 웃어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정말로 이를 드러내고 웃지 않을 단호한 뜻이 전해져왔다. 미소를 띤 입술 모양이 커다란 코끼리의 단단한 상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