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사람들이 헤어지는 순간이 오면 소위 교양이라는 것은 작동을 멈추고 우리 내면에 숨어 있던 야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예를 들면 헤어진 연인의 자동차에 흠집을 내는 유지태의 모습(<봄날은 간다>)은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수한 청년의 앙갚음 정도로 그나마 귀엽게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영화 <클로저>와 같은 경우라면 그건 확실히 '야만'이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연인에게 "그래서 그 남자하고 잤어? 오르가슴을 몇 번이나 느꼈어?" 같은 치졸한 질문을 거침없이 해대고, 심지어 자기 연인에게 모멸감을 주는 동시에 그 연인을 가로챈 남자에게는 자신이 받은 똑같은 크기의 배신감을 선사하기 위해서 이혼해 줄 것을 요구하는 여자에게 이혼 동의를 미끼로 마지막 섹스를 제안한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지 생각하면 왠지 몸서리가 처지는 부분이다.
거의 모든 사랑에는 끝이 있다. 슬픈 일이지만 사랑에 들떠 반짝반짝 빛나는 마법의 시간은 곧 지나간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모두들 나쁘게 헤어지는 걸까? 상처가 되는 줄 알면서도 독설을 퍼붓고, 남의 이메일을 열어보고, 기꺼이 집요한 스토커가 되어 상대의 주변을 맴돌고, 복수랍시고 그 남자의 친구랑 섹스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 며칠 전 뉴스를 보니 변심한 연인의 이메일을 열어 그 주소록에 등록된 사람들에게 두 사람이 한창 사랑했던 시절에 찍었던 섹스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보낸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인류학은 우리가 어떤 몽매와 비극의 극단에 서 있는지를 어떤 학문보다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인류학자답게 연인들이 덜 고통스럽고 덜 과격하게 헤어지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했던 프랑코 라 세클라의 책 <이별의 기술>(기파랑 에크리)에 의하면 이별의 광기는 첫 만남이 주는 그 누를 수 없는 욕망과 똑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나쁘게 이별하는 이유는 사랑의 본질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우리는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둘 사이의 이야기는 사랑이라는 격변 위에서 시작된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이야기가 끝날 때에도 격변의 성격이 그대로 발현된다."
하지만 프랑코 라 세클라는 애초 계획과 달리 덜 고통스럽고 덜 과격하게 헤어지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저자 자신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과 인연을 맺거나 끊는 그 진부한 방식을 탈피하지 못한 채 여전히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 때문에 '새로운 이별의 기술을 고안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기술이 뭔지는 그 자신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 동안 우리는 많은 걸 상실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하고 사랑하고 사랑에 빠진다. 상실을 통해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얻는 것은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란 영화가 내게 특별히 사랑스러웠던 건 그들만의 그 깔끔한 이별법 때문이었다. 하반신 장애가 있는 조제에게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사회인이 된 츠네오는 그녀의 다리였고,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으며,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안길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들의 이별 순간은 의외로 너무나 담백했다. 츠네오는 아무런 위로나 변명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아침에 출근하는 것처럼 집을 나서고, 조제는 마치 오래 전부터 자기 혼자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츠네오의 부재를 담백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상실을 통해 조제는 비로소 혼자 휠체어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분명히 헤어지는 마당에 교양은 무슨 얼어죽을 교양이라며 마음 속으로 복수의 칼을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추천할 영화가 따로 있다. <바닐라 스카이>다. 카메론 디아즈처럼 동반자살을 도모하여 적을 확실히 죽이지 못할 거라면 복수는 아예 꿈도 꾸지 말아라. 무엇보다 상대를 죽이려다가 자신이 죽는 수가 있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상대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