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리자의 전리품이 되어왔다. 하지만 만일 실패자가 역사를 재창조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군(聖君)은 더 이상 성군이 아니고, 폭군(暴君)도 더 이상 폭군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역사는 시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무한히 재창조될 수 있다. <왕의 남자>의 인기 역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폭군 연산을 새롭게 재창조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올해는 특히 연산이 사망한 지 500년째 되는 해다. 500년 만에 부활한 연산이 로마시대의 폭군 칼리큘라를 난상토론장에서 만났다. 영웅이 등장하는 사극에 관해 한바탕 썰을 풀 작정이라는데, 어디 얘기 한번 들어보자. 특별히 아나운서계의 신화, 손섹히씨가 사회자로 나서주셨다(참고: 등장인물은 <왕의 남자>와 <칼리큘라>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을 뿐,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1. 폭군, 폭군을 만나다
손섹히: 폭군 여러분, 토론회에 참석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로 인사들 나누시고요.
연산: 하이, 방가, 방가!
칼리큘라: 아니, 자네는…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였으며 포락(烙: 단근질 하기)과 착흉(胸: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토막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을 서슴지 않았다는 조선의 폭군 연산 아니시오?
연산: 무엄한지고! 과인 앞에서 싼 입을 마구 놀리는 자네는 누군가? 선왕을 베개로 눌러 죽여 황제에 즉위한 뒤, 황실 안에 대형 매음굴을 만들어 놀았다는 정신병자 아니냐?
칼리큘라: 뭣이라? 그런 자네 역시 성균관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왕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를 마구간으로 만들지 않았더냐? 자네 행적을 글로 쓰면 네버엔딩 스토리가 될 것이요, 말로 하면 목에 편도선염이 생길 것이야.
연산: 어디서 감히 복식호통을 주절대느냐? 하늘 아래 법도가 엄연하거늘. 아무리 그래도 과인은 여동생과 붙어먹지는 않았다, 이놈아!
칼리큘라: 뭬야? 여봐라, 저놈을 단근질하고 가슴을 빠갠 뒤, 토막내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거라!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연산: 쯧쯧쯧, 네 폭정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느니라. 봐라, 네 곁에 누가 있느냐?
칼리큘라: 그런 자네 곁에는 여잔지, 남잔지 분간도 안 가는 공길이가 있어서 참 좋겠구나.
연산: 뭐, 저 자식이?
손섹히: 자, 자. 나오시자마자 이러시면 곤란하죠. 진정들 하시고요. 오늘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간단한 당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토론장에서 음주하지 말 것, 둘째 방청석에 가서 난동 부리지 말 것. 이 두 가지입니다. 어길 시에는 강퇴 조치하겠습니다.
연산: 손섹히인지, 새끼인지 아주 맘에 안 드는 자식이로구먼.
칼리큘라: 그러게 말일세.
2. 영웅은 외로워
손섹히: 널리 알려진 바에 따르면 두분 모두 음주가무를 즐기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산군께서는 광대놀음을, 칼리큘라 황제는 웅대한 이집트풍의 연극을 기획하고 출연까지 하셨다죠? 그런 점에서 공통점이 많으신데, 어떠십니까?
연산: 글쎄올시다. 내가 광대를 사랑한 건 사실이오. 덜미(인형극) 공연을 하고 있으면 금세 마음이 풀리거든.
칼리큘라: 나도 그렇소. 새파란 내 후배 코모두스도 검술에 취해 있었잖소?
연산: 아, <글래디에이터>의 폭군 말이오?
칼리큘라: 맞소이다. 폭군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오. 선왕이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폐하께서 막시무스를 그렇게 친애하시지만 않았어도, 코모두스가 그런 열등감에 시달렸겠소? 자신의 친누나가 자신을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그가 그렇게 난폭했겠느냔 말이오?
연산: 우리가 통하는 데가 있구려. 나도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영웅은 외로운 남자들이라고.
칼리큘라: 맞소. 사람들은 날 광인이라고 비웃으나, 그들 중 한명이라도 나의 마음을 이해한 자가 있었겠소? 그들은 이해 못하오. 그래서 난 시황제가 부럽소이다.
연산: 무슨 말씀이시오?
칼리큘라: <영웅>이란 영화도 안 보셨소? 진시황제는 불로초 씹고 싶어 안달난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그는 통찰력이 대단히 뛰어난 왕이었소. 생각해보시오.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이 10보 앞에 있는데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담대함이 그에겐 있었소. <영웅>의 진정한 영웅은 무명도, 비설도, 파검도, 장천도 아닌 바로 시황제였단 말이오. 그는 자신의 암살을 막으려했던 파검이 진정 자신을 이해한 인물이라는 것을 꿰뚫고 있었소.
연산: 또 열등감이 생기는구먼, 젠장. 그거 다 헛수작이오. 대저 영웅이란 무엇이오? 난 영웅에게도 약한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소이다. 어찌 다들 슈퍼맨, 울트라맨 같은 영웅을 꿈꾸는 것이오?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오.
칼리큘라: 그렇지가 않소이다. 영웅이란 존재 자체가 원래 비현실적인 것이오. 니체는 그랬소. 초인이란 필요한 일을 견디어 나아갈 뿐 아니라 그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초인이 바로 영웅이 아니겠소?
연산: 니체보다 일찍 태어났으면서 어찌도 그리 잘 아시오? 에헴.
칼리큘라: 내가 바로 그 니체요.
연산: 지대 광인이로세.
칼리큘라: 초인은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자아, 즉 타락한 욕망과 고귀한 이성의 양극단을 모두 지니고 있소.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자아를 동시에 가지기에 비로소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오.
연산: 머리 아프오. 난 공길이랑 희락원(喜樂園)에 가서 놀래. 난, 약한 남자야~.
(연산, 토론장을 뛰쳐나가려다 관리들에게 잡혀 들어온다)
손섹히: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제가 앞서 경고드리지 않았습니까?
칼리큘라: 무대 체질이 아닌가 보오.
연산: 무슨 소리 하시오? 나도 무(武)를 알고, 예(藝)를 아는 사람이오.
칼리큘라: 그래서 신하들에게 동물 탈을 씌우고 솜방망이 달린 화살로 쏴대는 장난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오?
연산: 이 자식이? 임금은 사냥을 하는 거야. 그게 법도야.
(연산, 뒤에서 화살촉을 빼내자, 칼리큘라도 칼을 빼든다)
손섹히: 여러분, 웬만하면 고정하세요! Calm down!!
(두 사람, 활과 칼을 도로 집어넣는다)
연산: 내 진짜 호랑이에게 네 놈을 던져 물어뜯게 해도 성에 차지 않으나, 신성한 동물의 입을 너 같은 놈의 피로 더럽힐 수 없어.
(연산, 이를 바드득바드득 간다)
3. 여자는 영웅이 될 수 없는가?
손섹히: 잠시 장내에 소란이 있었습니다. 사회자로서 대신 사과드립니다. 자, 그럼 여기까지 얘기한 내용을 살짝 정리해보겠습니다. <글래디에이터>와 <영웅> 등 영웅이 등장하는 사극에 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칼리큘라 님께서는 영웅은 이성과 욕망을 동시에 지닌 완벽한 초인이라고 하셨고, 연산군께서는 외롭고 약한 남자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연산: 그렇소. 누구나 신화가 되면 외로워지는 법이라오.
손섹히: 그렇군요. 그럼 이쯤에서 화제를 살짝 바꿔야겠습니다. 사극에 나오는 영웅은 주로 남자입니다. 연산군께서도 ‘남자’라고 못박으셨고요. 그렇다면 여자는 영웅이 될 수 없는 거라고 보십니까, 연산군?
연산: 당근이오. 영화도 그렇잖소. <글래디에이터> <알렉산더> <킹덤 오브 헤븐> 어느 영화를 봐도 여자는 보조자일 뿐이오. 이야기가 지루할 만하면 나타나 영웅과 몸 한번 섞어주고 사라지지 않소? 녹수 고년도 보시오. 질투에 불타는 한 마리 여우나 다름없지 않소? 어디, 한낱 아낙이 영웅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단 말이오?
칼리큘라: 허허, 연산. 자네는 천상 마초구려. 500년 전에 태어난 걸 다행으로 아시오. 요새 그런 얘길 했다간 안티 팬들한테 오이로 맞아가며 욕먹을 것이오. 시대가 어떤 시댄데…, 쯧쯧.
연산: 그럼 여자도 영웅이 될 수 있단 말이오?
칼리큘라: 그렇소. <잔다르크>란 영화도 안 보셨소? 아시다시피 잔다르크는 여자요. 15세기 프랑스의 구국 영웅이었으나, 끝내 마녀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화형을 당했더랬소.
연산: 여자는 마녀요. 우리 어머니도 마녀였소. 나는 여자들의 희생양이오. 알렉산더에게도 동병상련을 느끼오. 어려서부터 뱀과 노는 법을 가르쳤던 야심 많은 어머니 올림피아 손에 키워지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하지만 아무도 올림피아를 영웅이라고 부르진 않잖소?
칼리큘라: 정치적 야욕이라면 막시무스도 올림피아만큼 못지않게 컸소. 그는 일개 장군이었으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타도하려고 했던 게 아니오? <글래디에이터>의 루실라 공주는 또 어떻소? 루실라는 막시무스에게 그라쿠스 의원을 소개해주었고 이것은 쿠데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더랬소.
연산: 에이~ 시끄럽소. 암만 그래도 나는 여자를 못 믿겠소이다.
칼리큘라: 하지만 연산 당신도 영웅은 약한 존재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연산: 그렇소.
칼리큘라: 그렇담 약한 여자는 왜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이오?
연산: 그건….
칼리큘라: 들어보시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오.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남자로 정해진 건 아니오. 영화에 남자 영웅이 등장하는 것은 시대적인 한계도 한계거니와,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남자이기 때문이오. 그들은 여자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모르오.
연산: 그것도 매음굴에서 익힌 철학이시오?
칼리큘라: 이런 4가지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약한 남자가 영웅이라고? 당신을 보면 약해 빠진 인간만큼 소인의 기질을 타고 난 사람이 없는 것 같소이다! 평생 태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피 비린내만 맡다가 죽은 게 자랑이오?
연산: 오호라~, 그래서 자네는 죽어가기 전에 ‘나는 살아 있다’라고 외쳐댔던 거로군? 내가 알기론 당신이야말로 태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오. 입양아로 살다 불법으로 황제에 오를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니오? 난 진정 야심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소. 나는 우리 어머니가 짐지워준 운명에서 벗어나 광대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 뿐이오.
칼리큘라: 그게 학살의 이유요? 영웅은 그래도 된다는 것이오?
손섹히: 여기서 잠깐!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군요. 그러니까 연산군의 영웅은 야심 없는 불쌍한 남자이고, 칼리큘라 황제의 영웅은 남녀를 막론하고 목표를 위해 나서는 야심찬 인물들이란 말씀이시군요.
연산, 칼리큘라: 그렇소.
연산, 칼리큘라: 찌찌뽕이오.
(장내 소란해지기 시작한다)
관련 영화 보기
<글래디에이터>, <알렉산더>, <킹덤 오브 헤븐>, <잔 다르크>
4.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손섹히: 플라톤은 사주덕(四主德)으로 지혜, 정의, 용맹, 절제를 꼽았습니다. 그래서 사극의 주인공인 영웅들은 이 덕들을 겸비하고 있고, 정적들은 대체로 야심 넘치는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럼 두분께서 생각하시는 영웅의 필수조건으로는 뭐가 있습니까?
칼리큘라: 일단 내 생각은 이렇소. 영웅의 일생은 파란만장해야 하오.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를 보시오. 촉망받는 로마시대의 장군이던 그가 코모두스의 야심 때문에 노예로 떨어졌다가, 검투사로 대중의 인기를 얻고, 끝내 쿠데타로 자신의 꿈을 이루지 않았소? <킹덤 오브 헤븐>의 발리안은 대장장이였고, <기사 윌리엄>의 윌리엄은 천한 지붕 수리공의 아들이었소. 드라마틱한 인물의 인생이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법이오.
연산: 그럼 우리도 영웅이겠소이다. 나와 당신만큼 파란만장하게 살다 간 인물도 드물지 않소?
칼리큘라: 당신이 생각하는 영웅은 대체 어떤 사람이오? 약한 인간이오?
연산: 과인이 말하는 약한 인간은 야심 없는 평범한 인간이란 뜻이오. 무릇 영웅이란 야심이 없어야 하오. 막시무스한테 어디 야심이란 게 있었소이까? 그는 코모두스처럼 단지 황제 자리를 노리고 선왕께 충성한 게 아니오. 그저 장군으로 살다가 명예롭게 죽고 싶어했던 것 아니오? <킹덤 오브 헤븐>의 발리안도 시빌라 공주와의 결혼과 국왕 자리 유혹을 동시에 물리치고 십자군전쟁 뒤에 조용히 대장장이로 돌아오지 않소?
칼리큘라: 나는 생각이 좀 다르오. 영웅에게 야심만큼 필요한 것도 없소. 단지 정적들과 달리, 야심을 감추고 있는 것뿐이오.
연산: 그렇다면 <알렉산더>의 알렉산더만한 비영웅적인 인물로 없겠구려.
칼리큘라: 그게 무슨 말이오?
연산: 알렉산더는 ‘왕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칼과 고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필립왕의 가르침을 따르며 자랐소.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여긴 그는 피에 굶주린 전쟁광이란 욕을 들어먹으며 동방 원정에 골몰했소. 그리고 페르시아를 비롯한 3,500,000km에 달하는 영토를 8년간 정복해나갔소. 자네 말에 따르면, 그가 이토록 야심을 드러낸 독재자였기에 그는 영웅이 된 것이겠구려.
칼리큘라: 그럼 알렉산더가 영웅이 아니란 소리요?
연산: 그렇소.
칼리큘라: 알렉산더가 영웅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영웅이란 말이오?
연산: 진정한 영웅은 야심 없이 제 할 일을 하다 간 불쌍한 남자들이오. 바로 나 같은.
칼리큘라: 하하하, 웃기지도 않소.
연산: 그렇다면 잘난 당신의 영웅관은 대체 무엇이오?
칼리큘라: 말했잖소? 파란만장하게 살다간 야심만만한 인간들이라고. 물론 야심만이 영웅을 만드는 건 아니오.
연산: 그럼 또 뭐가 있단 말이오?
칼리큘라: 희생정신이오.
연산: 희생정신?
칼리큘라: 멸사봉공이란 말이 있지 않소?
연산: 그럼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예수만큼 대단한 영웅도 없겠구려.
칼리큘라: 맞는 말이오.
연산: 그렇다면 왜 당신은 기독교에서 금기시하는 성적 타락에 몰두하였소?
칼리큘라: 그건…, 과거는 묻지 마시오.
연산: 참, 겉 다르고 속 다르시오.
손섹히: 패널 여러분, 지금 거의 시간이 다 돼서 정리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리하기보다는 오늘은 특별히 시청자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태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광대처럼 살다 죽은 남자 연산, 그리고 마찬가지로 태생이 불운한 탓에 정치적 야심에 불타올랐던 남자 칼리큘라. 제 개인적인 소감은 두 사람은 모두 약한 보통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운명론에 맡기고 인생을 한탕주의로 살았던 바보 같은 사람들이기도 하고, 슬프게 살아야만 했던 운명 탓에 단 한번도 제 뜻대로 살아보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토론은 역사란 관찰자가 만들고, 영웅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자리였습니다. 시청자 여러분은 이 두 사람을, 어떤 눈으로 보셨습니까?
관련 영화 보기
<글래디에이터>, <알렉산더>, <기사 윌리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