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두려움 없는 여인의 향기, <게이샤의 추억>의 공리
2006-02-13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게이샤의 추억>은 청회색 눈동자를 지닌 게이샤 사유리의 삶을 뒤따르는 영화다. 예쁘고 재능있는 사유리는 치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 그녀를 질투하여 파멸시키려는 게이샤 하츠모모의 함정에 빠지고, 그녀가 스스로를 파괴하기에 이를 때까지 지뢰를 밟듯 경계하며 살아야만 했다. 단아하고 강인하고 곧은 이미지를 유지해왔던 중국 여배우 공리는 그처럼 사악한 여인이 되어 할리우드에 들어서고 말았다. 한동안 그녀를 앞지른 것처럼 보였던 장쯔이가 <리쎌 웨폰4>에 출연하며 그랬듯, 공리도 일단은 타협해야만 했던 것일까. 감독 롭 마셜은 다르게 생각한다. “하츠모모는 <게이샤의 추억>에서 가장 어려운 역이었다. 그녀는 단순한 악인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공리 덕분에 3차원의 깊이를 가진, 살아 있는 캐릭터가 되었다.” 그것은 진부한 공치사가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원작 소설의 하츠모모는 술과 질투에 취해 추태를 보이다가 기온(교토의 게이샤 지구)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영화의 하츠모모는 장엄한 비극을 연출하며 게이샤로서의 삶에 끝을 맺는다. 다다미 방을 뒤덮은 불길 사이로 비치는 어두운 눈동자, 체념한 듯 사선을 그리며 가라앉는 머리채와 어깨선. 공리는 못되기만 했던 하츠모모를 동정할 만한 여인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캐릭터를 열심히 파고드는 공리의 성실함이 그런 생명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연기학교에 다니던 시절 장이모의 <붉은 수수밭>에 출연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공리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스크린에 나서는 한순간 한순간을 소홀히 흘려버리지 않는다. 왕가위는 <2046>에 고작 10분간 출연했을 뿐인 공리가 어떻게 도박사 수리첸을 준비했는지 기억한다. “공리는 현금이 든 핸드백을 가지고 마카오 카지노에 다니면서 도박을 배웠다. 그녀는 수리첸이 어떤 여인인지 정확하게 알고 싶어했고, 그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녀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묻곤 했다.” 연인이었던 장이모와 결별하고 재벌과 결혼한 이후 드물게만 영화에 출연했던 공리는 그런 과정을 거쳐 유혹의 에너지로 가득 찬 도박사가 되어 나타났다. 세월은 그녀를 퇴색하게 만들지 못했고, 오히려 날카로운 조각도로 깎아낸 듯, 선명한 윤곽의 여인으로 빚어냈다. 볼이 팬 광대뼈가 두드러지는 얼굴과 갸름하게 찢어진 눈매의 공리는 <게이샤의 추억>의 장쯔이와 양자경보다 훨씬 더 일본 여인에 가까워 보인다.

공리가 게이샤를 연기한 건 어찌보면 아이러니다. 경제학 교수의 막내딸로 태어난 공리는 그녀가 교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모를 저버리고 춤을 배웠지만 신체조건이 적합하지 않다는 평을 듣고 그만두었다. 그 다음은 노래였지만 이 또한 음역이 좁다고 하여 포기했다. 연기는 세 번째 선택이었다. 그런 공리가 평생 춤과 노래와 악기를 연마하여 일본 문화의 정수를 몸에 지닌 게이샤를 연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리는 기예를 익히는 험한 과정보다 원작의 작가 아서 골든이 미처 떠올리지 못한 하츠모모의 어린 시절을 들려준다. “하츠모모는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게이샤다. 그녀는 사유리처럼 어린 시절 모진 고난을 겪으며 그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나는 하츠모모가 불같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태우고 태워, 그녀 자신까지 태워버리는.”

이제 막 할리우드에 발을 들인 공리는 아직 영어를 할 줄 모른다. 그런데도 <마이애미 바이스>와 <영 한니발>에서 영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을 연기해야만 한다. <마이애미 바이스>에선 쿠바의 화교로 마약 카르텔을 이끄는 악녀를, <영 한니발>에선 한니발을 악의 세계로 인도하는 영국 여인을. 선생님에게서 외국 악센트가 섞인 영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공리는 마흔이 된 지금도 두려움을 모른다. “왕가위는 시나리오가 없이 영화를 찍는다.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고 내 인내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일하고 나면 세상 어떤 감독과도 일할 수 있다.” 그 장담은 단지 영화 한편에 얽힌 에피소드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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